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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ual Desire 라는 성윤리에 대한 책의 제 7장 내용입니다.


7장: 성의 과학

 

이 장의 주제는 과학적 문제로서의 성(sex)이다. 지금까지의 내 논의는 (과학적으로 말해) 표면에 상당히 집중되어 있었다. 즉, 현상들에 대해 기술하려 했고 그것들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혹자는 지금까지의 내 논의가 영속적 가치를 거의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fa다. 왜냐하면, 내 논의는 과학적 사실의 고유글자원에 의해 내 논의가 완성될 똴만 아니라, 재기술(redescription)에 취약해 결국 성과학의 발전에 직면해 반박될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1장에서 나는 이러한 반론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를 넌지시 말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이것을 좀 더 완벽하게 다루려고 한다. 두가지 접근을 검토할 것인데, 사회생물학과 프로이드적 심리학이 그것이다. 이 둘은 각각 성적 행동에 관한 우리의 사고에 혁명을 몰고 왔고,(정당하든 않든 간에) 우리의 도덕적 태도에 있어서의 엄청난 수정을 가져왔으며 이는 사회적 변동이나 종교적 개혁(crusade)을 결과했다.


7.1 성에 관한 생물학

인간은 동물이며 인간의 기능들 중 어떤 것도 유성 생식(sexual reproduction)의 기능만금 동물적 본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동물성'(animality)이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성적 행동의 경험 때문에 우리 사고의 착상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행위를 '짐승적인'(bestial) 것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그 행위가 일상적인 성적 표현을 형성하는 다른 행위들과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는 것을 대개 깨닫는다. 그리고 진화론적 관점으로 볼 때, 이러한 모든 정교한 의식(ritual)의 기본적 원동력이동물계를 통틀어 발생하는 생식(reproduction)임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레 우리의 성(sexuality)이 개, 고양이, 그리고 말에 의해 예화되는 법칙들에 복종하고, 인간 종의 특정한 진화적지위에 의해서만 수정되는 하나의 동물적 현상일 '무'(nothing but)이라고 결론짓기 싫다. 이런 이유에서 혹자는 지금까지의 내 기술은 인간 행동의 실재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둘러싸서 '진정한 인간 본성'의 당황스런 사실들을 숨기는데 사용되는 사고와 환상의 후광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술들이 성욕의 본성을 표상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재를 외양으로 잘못 취급하는 것이며 이론적 진리를 습관적인 환상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물론, 동물 힝동과 인간 행동간에 밀접한 유비관계가 성립함을 부인하기는 불가능하다. 구애와 경쟁(rivalry)에서부터, 정숙함, 질투, 그리고 성적 대결(sexual congress)를 지나, 부부의 정절과 비탄(grief)에 이르는 인간 성의 모든 행동은 동물계에서의 그것들과 유비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동물행동을 수인(獸人)동형적(anthropomorphically)으로 기술하려는 유혹은 우리 세계와 '하위' 종들의 세계들 간의 불가항력적인 동일감을 종종 결과한다. 거미의 구애에 대한 다음의 기술을 생각해보자:

암컷을 보는 수컷 거미는 흥분하는 것처럼 보이고 당장 암컷에게로 가까이 갔다. 숭배의 대상인 그녀를 위해 호색적인 그는 가장 놀랄만한 포퍼먼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틀어가면서까지 그의 모슘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그에게로 돌진한다. 그는 앞 다리 한 짝을 치켜들고 그녀를 끌어 안을 것처럼 자세를 취한다‥‥‥ 흥분한 그녀는 그녀의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몸을 거의 직각이 되도록 올린다. 그들은 더 가까워 진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밑으로 들어가고 그는 그녀의 머리 위로 기어간다. 그리고 교미는 완성 된다.


이 기술(description)은 매혹적이다. 이것은 막스베버주의자의 입장에서도 매혹적이다. 이것은 인간 정신에 대한 자신의 내적 이해로 모든 행동을 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그런 기술이다. 이런 식의기술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구애에 관해 '흘깃 봄(glances), '흥분', '부드러운 시선', '존경', '열정'(ardour), '호색'(amorousness) - 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옳은 만큼, 거미의 구애를 기술하는 데에도 그런 용어들을 쓰는 것이 옳다고 논증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역으로, 우리가 거미들의 용어들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만큼, 인간의 용어들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후에 나는 위와 같은 '수인동형적'(동물의 형태와 속성을 인간의 그것과동일한 것으로 보는 관점)' 기술을 이른바 '인원동형적'(simiomorphic: 인간의 형태와 속성을 유인원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관점) 또는 심지어, '인충동형적'(entomorphic) 기술(월슨과'모리스와같은 사회생물학자들에 의해 제공된 인간 행동에 관한 기술)과 비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이 비교로부터 각 입장의 그룻됨을 보길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우리의 출발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 출발점이내 결론들을 방어해 줄 것이다. 생활세계(Lebenswelt)는 우리틀 위치지운 세계이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따라서 우리의 모든 기획의 본질, 방향, 그리고 합당함이 결정된다. 생활세계의 이런 혹은 저런 특징이 몇가지 설명적 과학의 이디엄으로 번역됨을 보인다고 해서 생활세계의 비실재성이 중명된 것은 아니다. 이는, 색깔들을 지시하지 않는 물리 이론으로 색깔들이 설명될 수도'있옴을 보임으로써 색깔의 비실재성을 중명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매문이다. 내가 추구하고 있는 입장은 다음과 같다. 비록 성욕과 그것의 부수 현상들은 중요한 의미에서 유성생식적 존재로서 우리의 생물학적 조건 속에 뿌리내려져 있지만, ‘하등’ 동물과 공유하는 인간 행동의 측면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기술한 바대로 욕망은 일종의 사회적 인공물, 즉 협동적으로 얻어지고 정상적인 경우에 협동적으로 즐겨지는 그런 반응 패턴이다. 이런 반응이 없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사실, 후에 기술하겠지만, 성욕이 없는 종은 광범위한 대인적 반응을 결여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단지 동물이 아니도록 기술하게 만드는 그런 특성(인격성)을 결여할 것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동물들이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을 인격으로 변형시키는 집합적 노력은 또한 욕망의 조건들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은 두가지 상이한 의미에서 동일하다. 개인적 상호작용의 수준에서 존재하는 욕망의 사회적 구성은 우선 친숙하고 되풀이되는 지향적 이해의 대상으로서 기술된다. 우리가 기술하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생물학적 결정인자를 찾는 일온, 그것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을 놓쳐버리게 할만크 현상적 실재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이 과학자들을 침묵하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첫 걸음은 이론에 속하거나 이론을 구성하는 용어들로 현상을 재기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우리의 지향적 기술이 가지는 이론적 비적합성을 재빨리 지적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자아 개념 안에 형이상학적으로 의심스러운 무언가가 존재함을 거의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과학자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일상적인 이해의 환상을 버리고 인간 조건에 대한 '진정한 진리'에 직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자는 마치'이데올로기'의 베일을 벗기고 사회의 숨겨진 본질('물질적' 토대)을 드러내는(적어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막스주의자와도 같다. 과학자는, 인간 행동의 표면 - 대인적 이해로 드러나는 - 이 집단적 환상 이상의 어떤 것임을 보여주어야 할 부담은 항상 상대방에 있다고 논증할 것이다.

7.2 사회 생물학

성 행동에 대한 과학 중에 가장 급진적인 것이 사회생물학이다. 사회생물학은 사회현상의 특이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종의 생존에 대한 기능적 관계를 통해 진화론적 용어로 설명하려고 한다. 앞서 언급된 거미의 구애 의식을 생각해보자. 어떻게 그런 현상을 설명할 것인가? 크게 두 가지 대답이 존재한다. i)기계적 설명: 이런 특정한 자극(암컷의 모습)이 이런 특정한 반응을 어떻게 산출하는지는 기술하는 것. ii)동물 행동학(ethology)적 설명: 거미가 위의 기제를 어떻게 가지게 되었으며 유지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 이와 같은 두 가지 설명은 논리적으로 독립적이다. 비록, 상보적이길 바라지만 말이다 첫 번째 설명은 아직은 용이하지 않다. 왜냐하면, 신경과학이 그 정도로 진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두 번째 설명은 비교적 용이하다. (적어도 시작하기는 용이하다) 다윈주의적 진화론은 그런 모든 현상을 기능성이라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설명한다. 구애 춤이 어떻게 거미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 기능하는지를 보임으로써 우리는 구애 춤을 설명한다. 성 선택(sexual selection)에 관한 일반 이론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패캄(Peckham)의 기술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그런 춤을 출 수 있는 수컷 거미는 분명히 더 적응적이며 활동적이다. 그리고 그 거미의 자손 속에 보존되는 그것의 유전자들은 그 종족의 건강과 활동에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빌빌대는 수컷을 멀리하는 암컷 거미는 그녀 자손의 유전적 우월성을 더 강화시킨다. 이런 생각은 교미 기간에 발생하는 수컷들 간의 다툼을 설명한다. 이와 함께 상당히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 다른 많은 사실들도 설명한다. 월슨(E. 0.Wils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시하는 행위는 물건팔려는 행위와 안사려는 거부행위간의 관계처럼 보일 수 있다. 수컷처럼 일반적으로 구애하는 성은 자손에 대해 생식적 노력을 덜 하려고 계한다. 수컷이 암컷에게 제공하는 것은 주로 자신이 완전히 정상이며 생리적으로 괜찮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것을 보증하기 위해 간단한 퍼포먼스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룻된 이미지를 드러내는 덜 적합한 개체에게는 강한 선택압이 작용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구애를 당하는 암컷은 과시 행동들을 보이는 여러 수컷들 중에서 진정으로 적합한 놈을 고르는 능력을 가질 때 매우 유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결과적으로, 구애당하는 성온 수줍음(coyness)을 발달시킬 강한 경향이 존재할 것이다. 즉, 구애당하는 성의 반응들은 훨씬 더 많은 과시를 불러일으켜서 정확한 구별을 더 용이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조심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은 수인동형적 언어를 피하려는 과학자들에게 거의 힘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위의 설명은 '강한'이라는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함으로써 약점을 겨우 숨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칙은 왜 분명하다: 우리는 성 행위를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애, 정숙, 질투, 일부일처와 같은 특이한 현상도 설명할 수 있다. 유전자 자신의 영속을 위한 유전자 자신의 비인격적 재촉이 그러한 현상의 기능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추론함으로써 말이다. 예컨데, 질투는 다른 동물이 가지는 유전자릉 계속적으로 퍼뜨리는데 자기 자신의 정력을 덜 쏟도록 할 것이다. 여기서 상상의 도약을 조금만 하면 바로 인간 세계에 다다른다. 그러면, 자존심을 가진 그리스 청년들이 한 여자를 위하여 트로이의 벽 앞에서 의미없이 피를 쏟는 경우는 발정기에 숫사슴들이 뿔 싸움을 하는 현상과 동일하지 않은가? 이런 유비를 거부함으로써 다윈주의 적 진화론이 인간 사회가 없을 것이다
(사회생물학에 대한 비판) 하지만, 사회생물학은 늘 비판을 받아 왔다. 가령, 사회생물학이 엄격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특히 그것이 민속생물학(ethnobiology, 우생학을 말하는 듯)의 근본적 문제 - 유전자결정론의 '문제 - 를 제기하지 못한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진화의 기제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다윈주의적 이론을 훨씬 더 복잡한 사실들(현상들)에 확장 적용하는데 있어서 조심스러워야 한다. '어떻게'의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없다면, 그런 식의 확장은 기능적 설명의 내용을 전체적인미결정 상태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다. 만약 다윈주의적 이론이 일반적으로 참이라면, 역기능적인 행동은 점점 살라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남아 있는 극히 다양한 (역기능적) 행동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면 그 이론은 별로 쓰임새가 없다. 스쿠르튼은, 이 경우에 진화론이 ?종의 생존?을?위하여 그런 다양한 역기능적 행동(가령, 이타적 행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는 의미에서 '자명하다'고 말하는 듯. 그리고 그는 사회생물학자들이 이런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종'의 관점 대신이 '유전자'의 관점을 채택했다고 보는 것 같다. (각주 6) 참조] 우리는 어떤 추가적 요인들이 저 방향이 아닌 이 방향으로 발달을 재촉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사회적 행동의 경우에, 이런 추가적 요인들이 유전적일 것이라는 보는 것은 너무 거대하고 지금까지는 보증되지 않은 가정이다.
또 어떤 이들은 사회생물학이 인간 사회에 대해 성급히 기술한다는 것과, 동물의 '사회적' 삶과 인간의사회적 삶을 구분할 만금 민감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사회 인류학자들)특히,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벌집 속의 꿀벌이나 개미집 속의 개미의 행동과 비교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그것 자신에 의해서 매개되며 그것 자신에게 대답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의 화살은 사회생물학적 탐구가 아니라, 사회생물학이 그것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도약해온 성급한 방식에 향해 있다. 결국,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존재들로서, 우리의 모든 상태들은 수태 순간에 시작되어서 우리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지배하는 유기체적 과정으로부터 형성된다. 정신 활동은 뇌의 활동이고, 뇌는 인간 신체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생물학 법칙들에 복종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인간의 특출한 사고구조는 자연의 다른 부분들을 지배하는 법칙들로부터 열외가 될 수 있을까? 진화론과 유전학은 아직 유아기 상태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의 성공은 부인될 수 없다. 가령, 인간 사회의 복잡한 특징 -예컨대, 일부일처제도 - 을 우리가 설명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이 제도의 민속학적 기능을 확인하는 일이 첫번째 할 일일 것은 분명하다. 그런게 했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제도의 존재에 대한 가장 만족스런 설명에 한 발 더 가깝게 접근한다. 그 설명의 기능적 부분이 어떨 것인지에 대한 월슨의 설명을 보자:

전형적인 거대 영장류인 인간은 천천히 번식한다. 엄마들은 아홉 달 동안 태아를 배 속에 키우고 그 후에는 종일 정기적으로 젖을 필요로 하는 유아들 매문에 꼼짝을 못한다. 수렴-채집 시대에 남자로부터 자녀 양육과 함께 음식과 거주에 기여할 수 있는 충성을 받아내는 것은 그 당시 여자들에게 이득이 된다. 여자에 대한 성적인 권리를 얻고 여자의 경제적 생산력을 독점하는 것은 각 남자에게도 호혜적이 이득이 된다. 수렵-채집적 삶으로부터의 증거들이 정확히 해석되었다면 이 교환은 거의 짝 결합(pair bond)의 보편성과 확대 가족(남편-아내를 중심으로 한 핵가족)의 확산을 야기했을 것이다. 성애(sexual love)와 가족 생활에 대한 감정적 만족은, 이런 타협「교환]에 대한 유전적 고정을 통해 뇌 생리의 어느 정도 프로그램 되어 있는 기제에 기초되어 있다. 그리고 남자는 석자보다 더 자주 교미할 수 있기 때문'에 짝 결합은 널리 나타나는 일부다처제에 의해 다소 강화되어 왔다.

물론, 우리가 사실들에 대한 이런 기술이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개탄할 있지만, 그런 설명들이 참임에 틀림없다고 가정하는 것만큼이나 그것들이 참일 수 없다고 논중하는 것은 똑같이 성급하다. 종의 의존하고 있는 성 행동은, 우리 종의 본성상, 개체의 변덕스런 선택에 생존맡길 수 없기 매문이다. 그런다면 설명은 참이란 말인가?

(1) 설명의 일반성 매문에 설명되는 현상들간의 진정한 구분이 재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넓게 볼매, 우리의 행동이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음을 의심할 수는 없다. 또한, 유전적으로 결정된 행동들이 역기능적이지 않을 때에만 그것들이 살아남을 수 있음도 의심할 수 없다 만약, 이런 사실들만으로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적 문제들을 풀 수 있다면 그 문제들은 금새 풀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론내릴 수 있는 모든 것은 무엇이 존재하든 간에 그것은 역기능적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행동(저런 행동이 아닌)이 여기 지금 존재함을 참이게 만드는가? 그 이론은 이에 대해 해답을 주지 않는다. -

(2)게다가, 그 이론은 인간 행동에 관한 대부분의 난제들에 진정한 해답을 줄 수 없다. 비인간 존재의 본성의 경우, 사건들과 과정들은 과학적 설명 - 원인에 의한 설명 - 에 의해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거의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세계는 현상을 설명함으로써만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현상들로 넘친다. 왜냐하면, 현상들은 그 자체가 이해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가령, 수학 - 분명히 유전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사회적 관행 - 올 생각해보자. 수학적 이해는 수학에 관한 사회생물학을 통해 생성될 수 없다. 어떤 수학적 실천(가령, 2 + 2 = 5라는)은 사실 유전적으로 역기능적이고 따라서 진화적 경쟁의 압력하에서 사라져야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수학적 진리의 본성에 관해 어떤 통찰도 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 2 + 2 = 4"임을 이해할 때 무엇을 이해하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의 수학적 관습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은 "2 +2 = 4"라는 우리의 선 이해에 의존하고 따라서 수학적 관습을 해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우리가 수학적 이해를 획득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설명은 우리가 획득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이유가 아닌)과 관련되어 있으며 경험법칙들에 독립적인 타당성 기준을 가지려하는 논리와 수학의 기초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물론, 성 행동은 수학적 추론과 동종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과적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따라서현상에 대한 인과적 설명에 의해서 강화될 필요가 없는 그런 종류의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수학과 유사하다. 우리의 대인적 이해는 사회생물학적 지식에 의해 영향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인적 이해는특이한 사실로서 사회생물학이 우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때문에 바로 따라나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3)오늘날 인간의 협동적 행동, 돼지 떼의 본능적 무리짓기, 벌떼의 웅집적 단위 형성 등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사회적'이라는 용어가 동일한 의미로 쓰여졌다고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그 행동 자체의 개념에 의해 매개되고 변형된다. 그 행동은 본능에 뿌리박고 있을 수도 있지만, 본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학습을 예화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 반응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 개인이 다른 이와 함께하면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호혜적이고 상호적인 반응의 존재로 생각하면서 행동할 때 그 행동은 협동이 된다. 합리적 협동과 본능적 응집(cohesion)간 - 인간과 개미 -의 차이는 너무나 커서 한 가지 설명 양식이 둘 다에 적용될 수 있을지가 의문시된다. 진화른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합리성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만들어 내는(invent) 능력이고 종의 유산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대답을 개별적으로 찾아가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합리적 존재는 종의 공통 속성이 아닌, 그리고 속성일 수 없는 행동이나 믿음들을 획득한다: 특히, 인간은 문화를 획득하고 인간의 자아와 의지는 어떠한 종-적재적인 명령보다도 이 문화에 대해 더 책임을 가진다. 물론, 진화론온 왜 우리가 이런 능력을 갖는지(즉, 이 능력을 갖게 되면 왜 우리가 더 잘 적응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소유한 덕택으로, 우리는 '종-존재'(species-being)의 수준을 넘어fi고 새로운 행동과 역사의 질서를 산출한다. 역사는 우리 자신이 만든 집합적 질서(collective order)이고 이 집합적 질서는 인간의 자의식을 만들어냈다.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행동도 생물학적으로 야기된다. 그러나 이것이 종의 진화적 조립으로 설명되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합리성은 우리에게 우리 종의 (자연적) 자질을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합리성 자체를 규율하는 법칙들로만 예측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사회생뭍학의 일차적 실수는 사회를 종 형성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즉, 한 종으로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배열되어 있기에 인간 사회들은 그들의 지배 특성들이 유전적 주입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구조는 종의 구조는 아니다. 사회는 협동의 산물이고 협동은 자아와 타자를 추론하고 대답하는 개체들(reason-giving & answerableindividuals)로서 인식함에 의해 매개되는 합리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행동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지향적 이해의 형식들을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회학자들온 그런 설명은 사회종에 관한 설명이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베버를 따르고 있다. 그 설명은 지향적 이해에 있어서 참여 행위를 포함한다. 어떤 경우든, 진화론이 어떻게 사회 행동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알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베버가 옳은지는 분명치 않다. 행동형식이 이해의 양식(mode)이라는 사실은, 그 행동 형식이 예화하는 바로 그 이해에 의해 그 행동 형식이 설명되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학적 이해에 관한 인과적 설명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수학의 부분은 분명 아니다. ) 동시에, 사회 행동에 관한 이론은 사회 행동의 자료들(사이)을 지향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1리고 사회생물학이 불완전한 이유가 바로 이점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회생물학은 사회 행동을 진화적 질서를 통해, 심지어 지향적 이해를 갖지 않은 종에 의해 현현된 과정들의 산물로 설명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달리 표현하면, 사회생물학은 행위는 지향적 이해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지향적 이해를 설명하지 않고도 설명될 수 있다고 간단히 덧붙이면서 지향적 이해를 제쳐두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향적 이해가 사회적 행동에 구성적(constitutive)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지향적 내용을 무화시키기 위해 사회생물학은 이런 난점을 숨기는 방식으로 인간 행동에 대한 정교한재기술에 착수해왔다. 사회생물학자들에 의해 제공되는 실제적인 설명은 설명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기술로 어김없이 시작한다. 이 때 결과되는 '인원동형론'이 상당히 흥미롭다: 데스몬드 모리스나 알렉스 컴포트 같은 선동가는 인원동형론이 인간의 도덕 지각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논증한다. 성에관한 사회생물학을 생각해보기 이전에, 또 다른 근본적 사회 제도(재산 소유권 제도)에 대한 그들의 설명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월슨은 '영역주의(ter.itorialism)에 관한 생물학적 공식이 근대의 재산 소유권 제도로 쉽게 번역된다고 논증한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고 꾸밈이 없는 일반화에 의해서 기술될 때, 그 행동은 새로운 향기를 얻는다. ' 고 논증한다. 그는 사회학자 피어리 반덴버그(pie.re van den Berghe)가 시에틀의 재산 소유의식을 기술한 글을 인용하면서 증거를 제시한다 이것을 보면 감정이 '개입되지 않고 꾸밈이 없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 특유의 것이라곤 없어서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인용문)

위의 인용문을 보면, 관찰자는 분명 재치가 없거나 소원한 상태이다. 우대받는 상황 - 주인에 의해서 초대받아서 집에 들어가는 경우 - 이 새의 영역 의식에나 적합한 언어로 기술되고 있다?'전형적으로 주인이 인식하고 초대한 경우에만 손님이 문턱을 넘는다' 사람들이 화장실에 대해 묻고 나서야 사용한다는 사실은 '그 집의 다른 부분들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추가적 요청의 특이한 측면이다' 행동들 중에 어떤 것들은 참여자들의 지향적 이해를 알려주는(irorm) 도덕 개념으로만 기술될 수 있다. 그러면 이 개념은, 사회과학의 필연적인 진보로 인해 우리는 그 개념없이도 곧 문제가 없을 것임을 나타내는 인용부호 속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어른은 아이들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책임이 있다' 대화는 '행동적 교환'이고 공손한 담화는 '인지 의식'(.itual of recognition)이며, 자기 자신임을 알리는 것은 '확인하는 음성을 만드는' 것이고‥‥동시에, 위의 기술은 언어에 대해 무지하고 끝이 이상한 망뭔경을 통해 대화자들을 관찰하는 어떤 이에 의해 주어진 기술처럼 보인다. 이것은 단지 행동에 대한 피상적인 관찰일 뿐이다. 그러나 이 행동들은 인간 세계에 대한 지향적 이해로, 그러나 사회생물학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용어로 기술되어야 한다.
사회 생물학자들이 그들의 무지를 기꺼이 인정해야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데, 월슨은 인간의 모든 유전적 역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좀 더 자유로운 성 도덕을 지지한다고 논증한다. 그는 성도덕에서 성 행동은 일차적으로 결속 장치로서 그 수단은 이차적으로만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성 행동이 유전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따라서 그의 방법으로 해명될 수 없음을 암암리에 인정하는 셈이다. 또한 그는 그를 인도하는 '과학'에 대해서 일정 정도 경시하는 것 같다. 성 행동이 일차적으로 결속 장치임이 사실이라면, 그 행동은 공포감과 질투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제약받아야 하고 따라서 정절을 가치있게 보는 '비자유적' 성 도덕에 끌릴 것이다. 반면, 성 행동이 일차적으로 번식 장치라면, 우리는 당장 그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단지 비인격적 양육이라는 효과적인 형식 - (용감한 신세계)에 나오는 - 올 발전시킴으로써 말이다. 이와 같이, 월슨의 '과학적' 관찰이 함의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과학'이 진지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다음 내용>

 

<영화로 읽는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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