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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정 교수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올리는 제자의 말씀.
선생님.
김영정 선생님.
지금 여기, 저희 제자들, 그리고 여러분들이 선생님 마지막 가시는 길을 기억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선생님.
왜 그리도 야속하게 일찍 저희를 버리시는지요?
제자들 대표로 선생님께 마지막 말씀을 올릴 슬픈 영예를 얻은 저는, 선생님께 꾸중 듣던 예전처럼, 철없이
선생님께 치기어린 불평부터 올립니다. 혹시나… 제게 야단치시기 위해 돌아오시지나 않을까 하는 어릿된
바램으로 말입니다.
선생님,
모두들 눈물에 젖어 조문을 하고 모여서 같은 말들을 했습니다. 청천벽력같다고.
이틀 전 오후에 예인이에게서 전화가 왔더군요.
공부하는 데에 상의할 것이 있어 가끔씩 전화하던 터라 그러려니 했는데, 전화기에서 나오는 말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소리가 눈물 범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잘 못 알아 들으니까 예인이가 토해내듯 소리치고는 엉엉 울더군요.
김영정 교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누구나 태어나고 죽는다지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겨우 두 달 전에 밝게 웃으시는 모습을 뵈었는데, 그 분을 이제는 영원히 뵐 수 없다고.
철학과 사무실에 확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선생님의 성실한 마지막 제자가 엉엉 울며
전화를 했으니까요.
철학과 사무실 전화는 통화가 되지 않더군요.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10초를 기다렸다 전화를 해 보고, 다시 5초를 기다렸다 전화를 해
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되어 제 머리를 때리고 마음은 돌이 되어 굳어서 다른 일들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저만 그랬겠습니까만.
장례식장으로 오는 길에 차 안에서, 그리고 지하철 안에서, 다른 사람의 이목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영전에 와서 국화 한 송이를 들려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선생님 가족들께 더 죄송스러워 삼가려
했습니다만 결국 폐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저희는 원망스럽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와 다른 제자들에게 왜 건강이나 신체의 불편함을 감추셨습니까?
제가 선생님의 부고를 듣고 버릴 수 없는 생각은,
어깨라도 자주 주물러 드릴 걸― 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선생님 어깨라도 자주 주물러 드렸더라면 그렇게 임종도 못하고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
뿐입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아니면 어떻습니까?
제가 논문도 늦었고 해서 선생님께 걱정만 잔뜩 끼쳐드렸는데, 매번 강의와 장학금만 챙겨주시는 은혜를
입고 갚을 길이 없었는데, 그런 것으로라도 은혜에 보답할 기회가 많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가 선생님 뵙고 기뻤던 때가 여러 번 있습니다.
제가 선물해 드린 차 드시고 좋았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희 집사람 그림을 연구실 벽에 걸어놓으셨을 때,
제가 지압 한번 해 드렸더니 시원하다고 하셨을 때, 그리고 논문 작업이 너무 늦다고 심하게 야단쳐 주셨을
때입니다.
참고적으로, 제가 유럽에서 태권도 제자들에게 받아온 와인은 선생님께 드렸지만 계속 안 드시고 연구실에
두셔서, 그냥, 제가 먹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절에서 얻은 좋은 녹차를 본부 사무실에 갖다 놓고 전화 드렸는데, 드셔 보시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 집 사람 그림 하나 드린 것은, 선생님 자녀 분이 그린 선생님 초상화와 함께 연구실에 나란히 걸려서
제가 혼자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중국에서 가져온 보이차가 좋았다고 하셨을 때도 그랬구요.
박사 논문 빨리 안쓰면 다시는 저를 보지 않으시겠다고 호통치셨을 때는 오금이 저리고 사시나무처럼 떨렸습니다만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가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공부 잘해서 기쁘게 해 드린 적이 없습니다만,
그렇게 제자들을 칭찬하고, 호통치고, 공부하라고 장학금을 매번 챙겨 주시고, 졸업하고서는 강의까지 챙겨주시던
선생님, 선생님은 이제 어디 계십니까?
김영정 선생님,
끊임없이 집착같은 가정들이 마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조금만 쉬셨다면 이리 빠른 이별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제자들이 선생님의 건강에 대해 조금만 더 건강에 신경썼다면 여전히 선생님을 뵐 수 있지 않을까?
하다 못해 총장님과 선생님의 견해가 달라서 안식년을 가지셨다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만약에―
그런 많은 만약 중에는 혹시라도 선생님께서 일찍 가지 않을 수 없었다면 임종이라도, 혹은 유언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념까지 섞여 있습니다.
선생님은 철학과 비판적 사고, 글쓰기, 나아가 한국 대학 교육 체계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셨지만, 그리고
저희 제자들이 그런 족적이 더욱 가치있도록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이리도 일찍 가시다니, 일찍 가시다니요!
선생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슬픔은 마르고 남은 기억들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으로 굳어지겠지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 존경이 어떤 다른 감정으로 선생님을 그려낼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희가 시간이 지날수록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처럼 서울대 캠퍼스를 회상할 때마다, 인문대 5동 앞을
거닐 때마다, 6동의 선생님 연구실 앞을 지날 때마다, 혹은 도서관에서 선생님의 저서와 논문을 볼 때마다,
흰머리가 희끗하지만 소년의 얼굴로 온화한 미소를 짓는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제자들은 끊임없이 선생님의 유지를 찾아내고 받들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런 저희 제자들의 다짐이, 선생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밟고 가실 수 있는 꽃잎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2009년 7월 30일
가장 큰 은혜를 입은
마지막 제자
이창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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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지식이 아닌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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