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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새로운 도덕 규범의 필요성과 윤리학의 정체성
1.
정보사회에 필요한 윤리학은 새로운 것인가?
많은 변화를 수반하는 정보사회에서는 어떤 도덕 규범이 필요한가? 기존의 도덕 개념들만으로 정보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인간활동에 대한 도덕기준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가?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확실히 기존의 도덕규범 체계와 얼마나 다르든 새로운 도덕 규범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도덕 규범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단순히 기존의 도덕 이론을 새로운 상황에 대해서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무어(J.H.Moor)에 따르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데, 그 까닭은 새로운 상황에는 정책의 공백 뿐만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개념적인 공백이 또한 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컴퓨터 윤리학의 작업 중 많은 부분이 컴퓨터 기술을 포함한 윤리적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틀을 제시하는데 투자된다. 컴퓨터 윤리학은 컴퓨터 기술의 본성과 사회적 영향을 분석하고 그러한 기술을 윤리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그에 상응하는 정책들을 정식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한편 존슨(Deborah G. Johnson)에 따르면 컴퓨터는 때로 일반적인 전문가들의 윤리적 주제가 갖는 그 맥락을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많은 경우에 그 맥락 변화에 따라서 일상적인 개념들과 인정된 도덕 규칙들을 모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예를 들어서 기능 불량 프로그램에 관한 책임이 문제시될 때 컴퓨터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그것이 서비스인지 일반적인 상품인지 판단하기 힘들어서 쉽게 책임소재를 가릴 수 없다. 하지만 이상과 같은 무어와 존슨이 주장하는 '윤리학'이 가리키는 외연이 무엇인가하는 데에는 다소 애매한 점이 있다. '윤리학'이라고 한 낱말로 총칭하기는 하지만 그 외연은 메타 윤리학에서부터 구체적인 응용 윤리학까지 매우 폭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어와 존슨이 새로운 윤리학으로서의 컴퓨터 윤리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할지라도 그 윤리학의 외연에 메타 윤리학적인 논의도 포함될 것 같지는 않다. 때문에 논의에 불필요한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 윤리학의 외연을 최소한 두가지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구체적인 규범체계로서의 윤리학이고 다른 하나는 그 규범체계의 근거가 되는 기본적인 입장과 가치 기준, 방법론 등을 다루는 윤리학이다. 전자를 '도덕 규범 체계'라고 잠정적으로 명명하고 후자를 '윤리학적 개념틀'이라고 명명하여 구분하기로 하자. 윤리학이 포괄하는 폭넓은 외연의 스펙트럼에서 이 두가지 층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정확히 어디에 그어져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계선을 어느 정도는 잠정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데 필자는 그 경계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자 한다. 즉 가치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사실적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윤리학의 판단들이 윤리학적 개념틀에 포함되며 구체적인 사실판단을 고려하기 시작하는 판단부터 구체적 규범제시에 이르는 윤리학의 판단 내용은 도덕 규범 체계에 해당한다. 이러한 구분을 전제하였을 때 무어와 존슨이 주장하는 새로운 윤리학은 도덕
규범 체계에 한정될 수도 있고 윤리학적 개념틀까지 포괄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찬반을 논하기 전에
필자는 일단 정보사회에서 새로운 도덕 규범 체계가 필요하게 되는 이유를 확인하고자 한다.
2
정보사회에서 새로운 도덕 규범 체계가 요구되는 이유 : 행위중심적 분석
정보사회에서 새로운 도덕 규범 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는 여러가지 논변에 근거하여 제시되었다. 하지만 필자는 정보사회에서 새로운 도덕 규범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를 좀더 구체적인 행위 중심적 분석에서 찾아 보고자 한다. 분석을 행위 중심으로 하고자 하는 까닭은, 도덕 규범은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의 행위에 대한 판단들에 기초하므로 새로운 규범의 필요성에 대한 많은 측면들이 매우 분명하게 부각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행위의 제 여건과 행위의 속성이 변화함에 따라서 윤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주장, 즉 행위와 윤리의 밀접한 상관관계는 틀림없는 것 같다. 도덕 규범은 행위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시대에 새로운 도덕 규범이 요구되는 조건들을 행위 중심으로 구분할 때 다음의 네가지 이유로 세분화할 수 있는 것 같다. 그 네가지 이유는, 첫째로 행위의 환경이 변화하였으며, 둘째 인간의 행위 능력이 변화하였고, 셋째로는 새로운 행위들이 나타났으며, 넷째로는 환경과 행위의 변화로 말미암아 행위 주체인 인간이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자세히 고찰해 보겠다. 첫째, 행위 환경이 변화하였다는 것은 도처에 컴퓨터와 컴퓨터 통신망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기존의 많은 활동들이 이러한 사회 여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서 화폐를 들고 가게를 찾아다녀야 했지만 지금은 컴퓨터 통신망으로, 혹은 전화 통화로 주문을 하고 역시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서나 은행에 전화를 함으로써 대금을 지불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교제하고 문서를 주고받는 환경도 변화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동일한 조건에서 은행의 특정 계좌에 든 자본을 활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비밀번호와 암호명 등을 알아야 한다. 즉 정보가 특정 행위를 할 수 있는가 못하는가 여부에 대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물질이나 에너지 못지 않게 정보가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되먹임 작용(feedback)을 하여 행위의 환경변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둘째로 인간의 행위 능력 변화는 환경의 변화와 함께 컴퓨터와 그 부수 여건이 제공하는 인과능력들에 기인한다. 한 예로서 이제 사람들은, 옛날에 하루 종일 도서관을 뒤져서 찾아야 했을 책을 컴퓨터 앞에서 1분이면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데이타베이스 소프트웨어의 발달로 광대한 양의 데이타를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검색하며 상호연관시킬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한 예전에는 큰 트럭이 없이는 실어 나를 수 없을 정도의 정보인 2백50만 페이지 분량의 문자정보를 12인치 광디스크 안에 저장하여 들고 다니거나 보관할 수도 있다. 조직체에서는 컴퓨터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그리고 통신망 구성의 정교한 기술의 발달 덕분에 의사결정권자에게 중대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능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정보 기술은 감시, 감독, 데이타 접속과 데이타베이스 검색과 같은 새로운 능력들을 제공한다. 컴퓨터 통신망의 발달로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도 어떤 기획에 대해 합작할 수 있으며 수 초만에 지구의 반대편으로 전문을 보낼 수도 있고 세계에 퍼져있는 이러한 인터넷 통신망의 많은 컴퓨터 시스템들을 수시간만에 못쓰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행위 능력의 변화가 생겨난 까닭은 컴퓨터에 의해서 대용량 데이타의 처리가 가능해지고 통신망의 발달로 시공간 압축 효과가 나타나며 컴퓨터의 논리적 변용성으로 인해서 이러한 제반 변화가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예전과 같은 유형의 행위에 따르는 인과관계가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새로운 유형의 행위들이 나타나게 된 것은 정보사회의 환경과 제반 가치의 변화 및 새로운 가치요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현대에 이르러 당연한 상품이 되어버린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사고 파는 행위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 초기까지 컴퓨터 업계에서는 보통 하드웨어만을 판매하고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따로 돈을 받지 않고 제공하였다. 이 시기에 소프트웨어를 하나의 상품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행위 조건의 변화로 인해 정보가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됨에 따라서 정보의 획득 및 수집, 저장 배포 및 임대하는 행위들도 나타났으며 정보를 훔치거나 빌려쓰는 행위들도 나타났다. 해커들이 다른 사람들의 은행 비밀 번호를 알아내거나 다른 사람들의 통신 암호명을 빌려 쓰는 행위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기존의 도덕 규범에서는 그러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상품인지 서비스인지 정체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며 암호명을 훔친다는 개념 자체도 설정하기 어렵다. 넷째로 행위의 주체인 인간이 변화하는 것은 어쩌면 정보화라는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행위능력 변화, 그리고 새로운 행위들의 출현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레인골드(Howard Rheingold)는 주장하기를, 첫째로 개인적 인간 존재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지각, 생각, 인성은 우리가 매체를 사용하는 방식과, 그 매체가 우리를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 영향받으며, 둘째로 컴퓨터로 매개된 통신은 우리의 인간관계와 우정, 공동체 의식들이 생겨나는 사람과 사람 간의 상호작용을 변화시킨다고 하였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IRC에 의해서 IRC 별명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새로운 정체성(正體性)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임홍빈은 정보기술의 두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으로서 정보기술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수단과 목적 간의 관계를 재고하도록 만들어 줌과 동시에 인간의 내면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정보기술은 오늘날 무엇보다, 자연적 사물들과 직접 관련하는 전통적 소재기술과 달리 상징적 의미세계의 질서를 가공, 처리하고 생산, 유통하는 '의미론적 기술(Semantische Technik)'로 규정되는데, 이러한 기술에 의해서 구성되고 조직되는 생활세계의 심층적 변화들은 기술의 적용단계를 넘어서 기술이 인간의 내면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심층심리적 분석이나 매체생태학적 분석을 요구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서 정보사회에서는 기존의 도덕 규범으로 제어할 수 없거나 혹은 그 정체성(identity)도 파악하기 어려운 행위들, 그러면서도 기존에 우리가 가졌던 도덕적 직관으로 판단하기 어려워 보이는 행위들이 나타난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예들이 일반 상업용 프로그램을 무단 복사하는 행위나, 고객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 저장, 배포하는 행위들, 음란물을 공개적인 인터넷에 올려 놓는 행위나 공공기관의 대규모 컴퓨터 시스템에 무단으로 접속하여 침입하는 행위 등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변화에 따라서 새로운 도덕 규범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인 컴퓨터 사용자들이 가상 공간에서 지켜야 할 기초적 예절을 다루는 네티켓(netiquette)이 그것이다. 네티켓은 전자우편(E-mail), 뉴스 그룹(Nes Groups), 인터넷 중계 대화(Internet Relay Chat) 등을 기본으로 한 네트워크 상의 에티켓으로서 금지대상 항목은 단순히 짜증나게 하는 것으로부터 심한 분노를 자아내는 것, 인터넷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아주 망치는 것에까지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 전문가들의 직업 윤리의 문제를 다루어 규범들을 설정한 미국 ACM(컴퓨터기기 협회: The Association for Computer Machinery)을 위시한 다양한 컴퓨터 전문가 단체들의 윤리강령(code of ethics)들이 있으며 해커 윤리(hacker ethics)와 같은 사이비(似而非) 도덕도 존재한다. 이상과 같이 인간과 인간의 행위 행위 그리고 그 환경의 변화로 인해 생겨나는 인간 삶의 총체적 변화로 말미암아 기존의 윤리 이론들을 적용하고자 할 경우에는 많은 수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윤리설들 중에서 목적론적 윤리설의 대표적인 유형인 공리주의의 경우를 보자. 공리주의의 입장에 따르면 윤리학의 가장 근본 문제인 행위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어떤 행위가 결과하는 세계 전체에서의 악을 뺀 선의 총합의 최대치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일 경우에 사회변화에 따라 행위 주체의 행위 능력과 행위 환경이 변화하였다면 당연히 그 행위 결과도 역시 변화할 것이므로 어떤 행위의 결과로서의 선과 악의 크기도 변화한다. 예를 들어서 산업사회 이전에는 다른 사람의 책과 같은 지적 작품을 개인이 다량으로 복사한다는 것이, 의자와 같은 물질적인 상품을 다량으로 복사하는 것에 비해서 더 쉽지는 않았으며 이러한 지적 작품을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는 환경도 갖추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정보사회에서는 일례로 누구나 컴퓨터 한대만 구입하면 극히 정교하고 기능이 막강한 소프트웨어라도 쉽게 다량으로 복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소프트웨어를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는 환경도 이미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지적 작품을 다량 복사한다는 동일한 행위가 공리주의 관점에서 사회변화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도덕 규범의 수정판이나 새로운 규범 체계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법칙론적 윤리설의 입장에 서더라도 기존의 도덕 규범 체계에 수정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법칙론적 윤리설에 따를 때 행위들은 그 행위가 산출하는 결과들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옳거나 그르다. 이러한 입장을 수정없이 받아들이라도 정보 시대에 나타나는 많은 새로운 행위들에 대해서 추가적인 규범의 확장이 뒤따라야만 하는 것은 확실하다. 예를 들어서 전문가 시스템을 통한 컴퓨터의 판단에 의존해서 치료를 하고 경영투자 결정을 내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새로운 의무론적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의 판단에 의존하는 행위는 기존의 의무론적 관점에서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법칙론적 윤리론자들 중 많은 학자들이 행위 자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인간의 도덕적 직관에서 발견하고자 하는데 사회가 정보화됨에 따라 인간 자체가 변화한다면 이러한 직관 자체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는 단순한 기존 규범의 확장만이 아니라 규범 체계의 많은 부분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정보사회에서 새로운 도덕 규법 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정보윤리에 대한 논의들 속에는 이와 같이 새로운 도덕 규범 체계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윤리학적 개념틀까지 요구된다는 주장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과 관련된 쟁점은, 정보사회에서의
도덕의 정체성(identity)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확대된다.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형식화하면,
정보사회에서의 도덕이 기존 윤리학적 개념틀의 활용인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윤리학의 수립인가를 묻는
물음으로 제시할 수 있다. 정보사회에서 기존의 도덕 규범 체계가 전면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존 윤리학의 기본 이론틀을 유지하면서 많은 부분을 수정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윤리학에 근거할 수도 있다. 이제 이에 대한 찬반론에 대하여 논의해 보도록 하자.
3.
정보윤리(혹은 컴퓨터 윤리)에 대한 새로운 윤리학적 개념틀 논쟁 : 찬성 논변들
먼저 첫번째로 컴퓨터 윤리학은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것이라는 입장을 살펴보자. 이러한 입장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즉 컴퓨터가 유발하는 활동의 규모 때문에, 혹은 컴퓨터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혹은 컴퓨터는 "원래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등과 같은 이유로 기존의 윤리적 쟁점과는 매우 다른 쟁점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컴퓨터 기술이 개념적인 공백을 산출하므로 새로운 윤리학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무어는 그의 유명한 논문 "컴퓨터 윤리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Computer Ethics?)"에서
컴퓨터 윤리학이 동적이고 복합적인 연구분야로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컴퓨터 기술과 연관된 사실들, 개념화들,
정책들과 가치들 간의 관계를 고려해야만 하는 분야라고 주장함으로써 컴퓨터 윤리학이 새롭고 독특한 윤리학이어야
한다는 주장의 출발점을 마련하였다. 한편 기술적 전환이 자동적으로 규범적 차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선형적인 사회발전을 가능케 한다고 보지 않는다는 입장도 이와 일맥 상통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와
자유재단](Progress and Freedom Foundation)은 이러한 사회변화를 다소 극적으로
표현하면서 변화를 위한 급진적인 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이 입장에 따르면 "정보사회의 중요한 단면인 가상공간은 기계라기보다는 에코시스템이며
문자 그대로 보편적인 생체전자적 환경(universal bioelectronic environment)이다.
이 가상 공간은 전화선, 동축케이블, 광섬유 라인이나 전자기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존재하고 전자적
형태로 존재하는 지식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지식은 아주 일시적으로 존재한다. 점점
더 그러한 지식은 물론 데이터, 정보를 담는 '저장소'를 만들고 있지만 이러한 정보와 지식의 활용 열쇠는
전자적 지식의 특수한 형태인 소프트웨어이다. 이러한 가상공간의 역할에 힘입어 정보사회를 의미하는 3물결
사회에서는 개인적 자유의 본질과 의미가 변화하고 표준화와 중앙집중화도 깨어지며 경제는 탈대량화하고 관료제
조직은 붕괴한다. 또한 새로운 지식의 형태는 일시적이고 주문생산된(customized) 지식이 되어
저작권과 지식의 특허권 보호는 불필요하게 되고 재산권은 정의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며 정부의 간섭 역시
불필요하거나 크게 축소되어야 한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제품의 도래는 역동적인 경쟁을 위한 잠재력을
창출하여 지금까지와 같은 정적경쟁이 아니라 동적 경쟁이 사회전체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의 뒷면에는 정보기술에서 가장 앞선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숨어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주장자들은 이러한 주장의 끝에서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가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미국이 1980년대 컴퓨터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그 이유는 미국 정부가 동적 경쟁을 허용하였기 때문이며 앞으로의 과제도 이러한 동적 경쟁을 허용하고 심지어는 고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직접적으로는 도덕과 무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에는 사태에 대한 설득력있는 기술이 있고 또 그 내용은 정보사회의 윤리에 대하여, 특히 사회윤리적인 관점에서 큰 함축을 지닐 수 있다. 한편 컴퓨터 윤리학의 독특성을 엄밀한 이론적 기초를 통해 주장하고자 한 사람은 매너(Walter Maner)이다. 그 주장에 따르면, 컴퓨터 윤리학은 컴퓨터 기술이 아니었으면 결코 나타날 수 없는 윤리적 문제들을 다루는 분야이다. 이러한 주장을 위해서 매너는 8가지 독특성 사례를 통해서 컴퓨터가 사용되는 상황과 컴퓨터가 사용되지 않는 상황 사이의 유추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다시 컴퓨터 윤리학의 탐구에 대한 독특성을 6 수준(level)으로 정당화하고자 한다. 그 중에서 컴퓨터 윤리학의 독특성 문제에 대한 현행의 논의와 관련해서는 컴퓨터가 사용되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 간에 유추가 불가능한 이유로서의 8가지 독특성 사례가 중요하다. 그 독특성 사례들은, 저장의 특이성, 특이한 변용성, 특이한 복잡성, 처리의 저비용, 특이한 간편성, 복사의 용이성, 특이한 불연속성, 코드화의 특이성이다. 매너가 말하는 저장의 특이성(Uniquely Stored)이란 모든 정보를 컴퓨터의 특이한 기계적인 방식(제한된 크기의 2의 제곱진수 방식)으로 저장하는 특성이다. 이 특성 때문에 컴퓨터로 저장한 모든 정보는 단 한 문자만 달라져도 모든 정보가 쓸모없게 된다. 특이한 변용성(Uniquely Malleable)이란 무어도 지적하였던 특성으로서 컴퓨터가 거의 무제한적인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는 특성이다. 특이한 복잡성(Uniquely Complex)이란 컴퓨터를 제작하고 그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 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 내부 작동이 복잡하다는 특성을 가리킨다. 이것을 무어는 컴퓨터 작동의 비가시성(invisibility)으로 특성화하였다. 처리의 신속성(Uniquely Fast)은 컴퓨터가 모든 계산을 놀라울 만큼 빨리 조직적으로 처리하는 특성이다. 이로 인해 증권시세의 변화와 같은 사회현상이 신속하고 급격하게 증폭된다. 처리의 저비용(Uniquely Cheap)이란 컴퓨터 가격이 낮고, 특히 초당 수백만번의 계산을 수행함에 따라서 각 계산의 비용이 거의 0에 가까와지는 특성을 가리킨다. 이 저비용의 특성으로 인해서 살라미 수법과 같은, 정보사회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컴퓨터 범죄 행위가 가능해진다. 복사의 용이성(Uniquely Cloned)이란 원본과 논리적인 차원에서 완벽하게 동일한 복사본을 극히 쉽게 생산해 내는 특성이다. 예를 들어서 음악 테이프는 복사를 하면 원본에 비해 복사본의 음질이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복사한 경우에는 원본과 복사본이 기능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하게 된다. 특이한 불연속성(Uniquely Discrete)이란 컴퓨터의 복잡하고 독특한 내부 작용으로 말미암아 입력과 산출의 변화량이 일정한 비례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특성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컴퓨터로 통제하는 대상은 극히 국소적이고 미세한 문제에도 취약하게 되는 특징이 생긴다. 예를 들어서 컴퓨터로 로켓의 궤도를 통제하는 경우에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부호 하나가 잘못 입력됨으로써 전혀 엉뚱한 결과를 유발할 수 있다. 코드화의 특이성(Uniquely Coded)은 기본적인 2진수의 0과 1의 숫자부호로부터 바이트(byte)와 레코드(record), 섹터(sector), 트랙(track) 등의 계층으로 복잡하게 구조화된 방식으로 정보를 코드화하는 컴퓨터의 특성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컴퓨터 코드는 다중적으로 암호화된(multiply encrypted) 효과를 낳으며 때때로 이러한 정보의 의미가 해독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므로 사회발전에 역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8가지의 독특성 때문에 매너는 컴퓨터가 사용되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 간에 적합한 유추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컴퓨터 윤리학의 중요성과 그 독특성에 대해서 가장 급진적인 견해를 주장한 학자는 크리스티냐 고니액(Krystyna Gorniak)이다. 고니액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컴퓨터 혁명은 사람들의 생활을 세계적인 규모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컴퓨터 기술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도 전지구적(global)인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전지구적인 특성을 갖는 보편적인 윤리학을 창조하도록 시도해야 한다. 전통적인 윤리학 체계는 특정한 종교적 신념에 근거해 있으며 그 때문에 문화가 이질적인 전 인류에게 적용되는데 한계가 있다. 특히 가상공간(cyberspace)을 중심으로 한 컴퓨터 활동의 영역에는 경계가 없다. 그러므로 컴퓨터와 관련된 이러한 독특한 행위들에 대한 도덕 규범들은, 컴퓨터 윤리학의 제창자가 컴퓨터가 어떤 특정한 인간 집단이 세계를 지배하는 수단으로서 활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떤 특정한 국지적인 문화에 근거할 수 없다. 이상과 같이 정보윤리가 완전히 새로운 윤리학이어야 한다는 학자들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무어와 존슨의 입장을 종합하여, 컴퓨터가 사회의 주된
도구와 매체로 사용되는 정보사회에서는 행위의 인과관계와 그에 따른 도덕적 맥락이 변화하여 도덕 개념의
공백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매너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설명하였다. 고니액은 특히 가상공간의
영향력에 근거하여 전지구적 윤리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4.
완전히 새로운 컴퓨터 윤리학에 대한 찬성 논변에 대한 비판
그런데 이상과 같이 컴퓨터 윤리학이 기존의 윤리학과는 다른 새롭고 독특한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동감이 가지만 그 '새롭고 독특한' 것이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여전히 애매한 면이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다음의 두가지 결점들 중의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즉 그것은 새로운 도덕 규범 체계가 요구된다는 점에서만 타당할 뿐 새로운 윤리학적 개념틀이 요구된다는 주장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비판을 허용하거나, 혹은 그 논변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틀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함축한다면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먼저 무어의 주장을 고찰해 보면, 컴퓨터 기술로 인해서 개념적 공백이 생긴다는 주장은 납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존의 윤리학적 개념틀이 완전히 적용될 수 없다는 귀결로 이어지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무어가 지적하는 '개념적 공백'(conceptual vacuum)에는 추상적인 개념틀의 공백까지를 분명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어의 논변을 확장하여 기존 윤리학적 개념틀로 포괄할 수 없는 개념적 공백을 지적하고자 한다면 순수 이론적인 측면에서 기존 윤리설들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면서 그 개념적 공백을 지적하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법칙론적 윤리설과 목적론적 윤리설, 혹은 처방론적 윤리설 모두가 근본적으로 포괄하지 못하는 도덕규범의 공백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컴퓨터 기술의 발달에서 생겨나는 개념적 공백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 이론적인 측면에서의 논의이고 컴퓨터 기술과 관련된 논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한가지 가능한 방법은 컴퓨터 기술이 창출하는 도덕적 딜레마 상황과 기존의 어떤 윤리학적 개념틀로도 포괄할 수 없는 개념적 공백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설득력있게 증명하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현재 무어의 입장에 포함된 논변은 아니다. 이러한 비판은 매너의 주장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매너의 논변은 무어의 논변을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분석해 놓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컴퓨터가 사용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간의 유추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기존의 모든 개념이 과연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매너의 주장대로 두 상황 간의 유추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두 상황을 총체적으로 비유하는 유추가 불가능하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부분적인 유추, 혹은 단면에 대한 유추는 가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컴퓨터 시스템에 대한 무단 접속을 남의 야산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론 컴퓨터 시스템에 침입하는 것과 남의 야산에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다르다. 하지만 그것은 구체적으로, 그리고 모든 면에서 같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모든 비유나 유추가 서로 다른 두 대상의 동일한 일면을 추상화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너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컴퓨터가 아무리 많은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독특한 성질들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 다른 기계나 물건들과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쟁점은 그 비유된 단면이 컴퓨터와 그 비유대상 간의 동일한 측면을 유추해 내었는가 하는 문제로 전환된다. 컴퓨터가 많은 독특성을 가지고 있고 그 독특성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컴퓨터 윤리학이 기존의 모든 윤리학적 전통으로부터 단절해야 한다는 주장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무어와 매너의 주장이 완전히 새로운 윤리학적 개념틀이 필요하다는 것을
함축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허용하는데 반해 고니액은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고니액의 주장은 그 충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그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거나 심지어는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난점을 안고 있다. 고니액의 주장에
대한 비판은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즉 기존의 윤리학은 그 보편성과 더불어 특수성도 함께
가지고 있다. 고니액이 주장하는 전지구적 윤리학(global ethics)은 보편성만을 가질 수도 있고
그와 함께 (문화와 종교적 신념에 있어서의) 특수성은 함께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고니액의 전지구적
윤리학이 보편성만을 가지는 윤리학이어야 한다면 왜 조금의 특수성도 덧붙어서는 안되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것은 매우 어려워보인다. 한편 고니액의 전지구적 윤리학이 특수성도
함께 가질 수 있다는 주장으로 양보한다면 그것이 기존의 윤리학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어렵게 될 것이다.
5.
컴퓨터 윤리학이 기존의 윤리학적 전통 위에서 제시될 수 있다는 입장과 그에 대한 가능한 비판들
한편 컴퓨터에 의해 제기되는 쟁점들이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컴퓨터에 관한 윤리학의 과제는 새로운 윤리학의 체계 전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인 개념들, 가치들, 그리고 이론들을 새로운 기술에 적용할 수 있도록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컴퓨터로 야기된 문제는 전혀 새롭고 독특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윤리적 문제가 새로운 모습으로 혹은 변형되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들이다. 김형철에 따르면 "정보사회라고 해서 별다른 형태의 가치관과 가치기준이 따로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적용해야 할 가치기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윤리의 기준에 대한 일관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가치기준의 적용 방식과 수단만이 기술의 발달에 따라서 변화되어 갈 따름이다." 또한 임홍빈도 컴퓨터 사용에 관한 행위 규범들은 기존의 윤리규범을 확대 적용하거나 응용한 경우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책임, 자유로운 정신활동의 가치는 어떠한 생산양식이 사회에서 지배적인가를 떠나서 보편적 당위성을 지닌다. 인간의 자기 이해에 뿌리를 둔 보편적인 가치들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행위자들에 의해서 비록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또 종종 현실 상의 삶 속에서 침해당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기본적 타당성 자체가 도전받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 윤리학에 대하여 논의하는 많은 철학자들 중에서 앞에서 언급한 철학자들이 컴퓨터 윤리학은 새롭고 독특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 비해서 그에 반대되는 입장을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철학자들은 상대적으로 적다. 필자가 보기에 그 까닭은 많은 학자들이 컴퓨터 윤리학 역시 기존의 윤리학적 개념틀 안에서 논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존슨과 니센바움은 컴퓨터 기술의 사용과 발전에 관한 많은 두드러진 논의들이 책임과 같은 전통적인 도덕 개념들과 사생활권과 같은 사회적 가치들의 언어로 체계화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한편 스피넬로는 정보사회의 윤리학에 대한 정체성 문제를 명시적으로 논의하지 않은 채 논의의 많은 부분에서 전통적인 윤리설들을 고찰하고 컴퓨터의 윤리적 문제들에 관해 그러한 입장들을 적용하고자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컴퓨터에 관한 윤리적 쟁점들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존슨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스피넬로와 존슨도 역시 기존의 윤리학적 개념틀 안에서 새로운 규범체계를 구성함으로써 정보사회의 컴퓨터와 관련된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제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입장에 대해서 컴퓨터 윤리학이 구체적인 규범체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개념들과 기본입장에서도 새롭고 독특한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학자들은 앞에서 제시된
많은 논거들, 즉 컴퓨터 기술이 사회변화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과 그러한 컴퓨터 기술이 기존의
다른 예를 통해서 유추할 수 없는 독특성을 갖는다는 등의 논거들을 통해서 비판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전통적 윤리설의 개념틀이 여전히 적용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필자가 앞에서
제시한 비판들과 더불어서 컴퓨터 윤리학이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에는, 사회 결정론
혹은 이데올로기적 결정론이 존재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이렇게 입장이 대립할 때 정보통신 윤리학
혹은 컴퓨터 윤리학이 새롭고 독특한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에 대한 증명 부담은 독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편에서 지게 될 것이다. 6.
전통적인 윤리학적 개념틀의 가능성과 새로운 규범체계의 필요성
정보사회의 도덕의 정체성 문제를 정보사회에서의 인간행위의 독특성 문제에 촛점을 맞추어서 고찰해 볼 수도 있다. 정보사회에서 새로운 도덕 규범 체계가 요구되는 네가지 이유, 즉 환경의 변화, 행위 능력의 변화, 새로운 행위의 출현과 인간의 변화는, 정보사회에서 컴퓨터와 관련한 새로운 도덕 규범 체계가 요구된다는 주장의 논거로서 앞에서 필자가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곧 기존의 윤리학적 전통과 단절된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윤리학적 개념틀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개념틀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를 고찰하기 위한 한가지 간단하게 제안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도식이다. 즉 도덕규범과 윤리학은 인간의 행위와 직접 관련되고 이 인간의 행위는 인간 주체와 사회의 상호작용 방식이라고 도식화시켜서 이해해 보자. 그러면 윤리학의 기본 개념틀과 그 정체성은 인간과 사회 양자의 정체성과 그 변화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러한 도식을 사용한다면 인간과 사회가 모두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경우 그 상호작용으로서의 행위와 그에 관한 윤리학의 정체성이 모두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한편 둘 중의 어느 한 쪽, 특히 인간의 근본적인 정체성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새로운 윤리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지나친 주장이 될 것이다. 사회학이 사회의 정체성과 그 제반 문제를 직접적인 관심대상으로서 탐구하기 때문에 인간보다는 사회에 더 직접 관련된다면 윤리학은 인간의 삶과 그 속에서의 가치문제를 다루므로 사회보다는 인간에 더 깊이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례로서, 정보사회의 윤리학에서 다루는 주된 쟁점 중 하나인 사생활권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 앞에서 우리는 정보사회에서 새로운 인간의 정체성이 나타나므로 새로운 도덕 규범들이 필요함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러한 인간의 변화와 정체성이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것인가 혹은 부분적이고 주변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해묵은 철학적 논의와 관련되겠지만, 그러한 논의를 생략하고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정보사회에서의 인간의 변화는 적어도 윤리적으로 유의미한 측면에서 총체적인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 주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인간의 변화는 인간의 주된 가치인 자유와 평등, 권리와 의무, 행복과 진리 등의 의미를 변질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레인골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새로운 정체성이 나타났기는 하지만 그것은 가상공간이라고 하는 새로운 환경과 더불어 생겨나는 '사회적' 정체성일 뿐이다. IRC별명을 사용함으로써 얻게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의 새로운 정체성이지 인간 자체의 새로운 정체성은 아닌 것 같다. 인간의 내면 세계에 정보기술이 미치는 영향도 마치 중심이 같은 동심원처럼 인간의 내면세계를 제약하거나 왜곡하거나 확장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세계의 활동을 변화시킬 수는 있어도 그 내면세계의 윤리적인 중심인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과 같은 기본가치들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인간의 윤리적 정체성 문제는 간단한 논의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의 논의에 한정할 필요가 있겠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하는 정보시대의 윤리학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필자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즉, 정보시대에는 새로운 도덕 규범 체계가 필요하지만
그러한 규범 체계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기존의 윤리학적 개념틀은 여전히 유효하다. 정보윤리학으로서의 컴퓨터
윤리학이 새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기존의 유효한 개념들에 새로운 사실적 판단들을 고려하여 새로운
도덕 규범 체계를 구성하는 작업과 그 내용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지 전혀 새로운 삶의 가치들을 제시하거나
선택하고 전혀 새로운 방법론에 기초한 윤리학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윤리학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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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읽는 윤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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