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철학과 관련지어서 어느 영화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그렇지만, <배트맨> 이야기를 하더라도 여러 가지 측면을 말할 수 있다. <영화로 읽는 서양철학사>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를 설명하면서 4가지 원인의 개념을 설명하느라고 <배트맨> 이야기를 했다.

또 다른 측면을 이야기한다면 선과 악, 혹은 정의란 무엇인가 등에 대해서도 관련지어 말할 수 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정의는 복수 이상이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가.

하지만 여전히 뻔해 보인다. <배트맨>이라는 영화로 어떤 철학적 이야기를 꺼낼까 하는 점에서 말이다.

뭐, 뻔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쁘지는 않지만, 나의 알량한 영웅심이랄까, 하여튼 그런 욕구로 인해서, <배트맨>이라는 영화에서 다른 사람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을 만한 철학적 주제를 언급해 보고자 한다. 나는 알량한 사람이니까.-_-'

자, 다 같이 생각해 보자. 아래의 <배트맨> 영화에 대한 소개 동영상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생각하게 되는 철학적 문제거리는 무엇인가?

나는 한 대사에서 문제 의식을 느꼈다. 미리 말하건대, 대단한 건 아니다.

내 문제의식은 영웅의 존재에 대한 것이다. 혹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개인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하나의 의문문으로 내가 느낀 문제거리를 표현해 보면 이렇다.

"특별한 개인은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이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이런 물음이 생겨난 까닭은?

영화를 보면 배트맨은 특별한 개인이다. 하지만 고담시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경찰도 무기력하고 군대도 무능하며, 사람들은 배트맨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위의 동영상에서도 4분 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 경찰 간부가 병원에 누워서 배트맨이 올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현실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물론 영화 속에서 배트맨이 엄청 돈이 많은 부자이고, 특별한 기술을 가진 회사를 소유해서 대단한 능력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실적인 감각으로 접근하면 그런 개인도 경찰이나 군대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혼자서 해결할 수는 없다. 더더군다나, 한 도시의 시민들이 위기를 만날 때마다 그런 개인을 기다릴 가능성은 더욱 없다.

이쯤에서 가볍게 불만을 뱉어낼 수 있다.

- 그냥 영화는 영화로 보고, 재미있으면 됐지, 그렇게 현실을 따질 필요가 있나. 그런 것을 따지려면 처음부터 왜 <배트맨>같은 영화를 봤어?

나는 이런 불만에 동의한다. 오히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

<배트맨>은 그 흥행기록이 말해 주듯이 재미있는 영화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 영화 내용에 몰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을 '모방'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이라는 책에서 한 말인데, 내가 생각할 때 아주 정확한 말이다.

'모방'이라는 분명한 용어가 튀어나오니 갑자기 생경한 느낌이 들 것이다. 난 그랬다.

좀 피부에 와 닿게 설명하면 이렇다. 영화의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그럴 듯 해야 한다'. 이 그럴듯함이 곧 현실과 어떤 점에서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현실의 한 부분을 모방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영화 속에서 도시 전체가 위기에 빠졌을 때 특별한 개인이 '짜잔~'하고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하고 영웅이 되는 것이 재미있는 이유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그런 영웅의 존재가 현실의 어떤 부분(비록 작은 부분일지라도) 반영한다는 것, 그리하여 같다는 것을 말한다.

중간 결론은 이렇다. <배트맨> 영화가 재미있다면 영웅이라는 개인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부분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이른바 '진보적'인 역사관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역사는 민중들이 역사이고, 그래서 개인이 그 가운데에서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의 주체는 민중, 즉 대다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한편 우리에게 친숙한 역사 속 이야기는 영웅을 중심으로 그러져 있다. 어느 나라는 누가(어떤 개인)이 세웠고, 어떤 왕국은 누구(어떤 개인) 때문에 망했다.

문제를 충분히 이해했을 만 하니, 명료하게 정리해 볼 필요도 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며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개인이 집단을 능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가능해 보인다.(배트맨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세상의 여러 일들을 이해할 때 개인을 중심으로 이해한다. (<배트맨>이 어떤 면에서는 현실적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미리 말해 두지만 이 글에서 내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할 것은 아니다.

최종적인 답은 각각의 사람들의 몫이다. 다만 나는 여기서 그 여러 사람들이 각기 가진 답들 중의 하나를 넋두리처럼 말해볼 뿐이다.

내 생각은 개인과 집단이 모두 중요하지만, 문제 해결적인 측면에서는 개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나의 관점은 보수적인 관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 평범하다. 나름대로 차이가 있지만 매우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그 차이는 거의 사라져 버려 무의미해진다.

그 속에서 집단들의 역사를 결정하는 것은 그 집단 속의 몇몇 개인들이다. 그 개인들은 다른 개인들 전부(즉, 집단)의 특징을 기반으로 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또 그것을 실천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역사 발전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실천을 하지만, 이 양자를 모두 가진 사람은 매우 적다. 그리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다시, 그것을 실천하기 전에 죽거나 병들어 사라진다.

2014년 8월 현재 <명량>이라는 영화가 갓 개봉되어서 한국 영화의 새로운 흥행 역사를 쓰고 있는데,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사람은 이순신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임진왜란 때 활약한 여러 장군들(권율, 김시민 등)의 위인전을 읽으면서 선조 임금을 위시한 그 모두가 나라를 구한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에야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이순신 한 사람이 없었더라면 나라가 그 때 망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반대로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병신같은 선조 임금 한 사람만 멍청하지 않았어도 임진왜란은 훨씬 쉽게 극복되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순신 장군은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이순신 장군은 현실에 실재했던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기록이 매우 분명해서 허풍은 하나도 없는 사실로서의 영웅 말이다.

내가 <그렇게 살라는 데는 다 철학이 있다>라는 책에서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맨 앞과 맨 뒤에 넣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영화보다 진한 현실에서 오는 그 감동과 놀라움, 그리고 존경심 말이다.

역사 속에서 영웅은 배를 모는 선장이다. 다른 사람들은 배에 불과하다.

<1> 어떤 배를 타고 가는지도 최종적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집단의 중요성)
<2> 누가 그 배를 모는지도 또 다른 큰 영향을 끼친다.(영웅의 중요성)

우리는 주로 <1>의 내용을 사회과학으로 이해하고 <2>의 내용은 역사나 이야기로 이해한다.

영화 <배트맨>은 <2>만을 따로 떼어서 허구로 구성해서 보여준다.

더 단순하지만 더 재미있게 말이다.

<그렇게 살라는 데는
다 철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