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드보이 철학적인 영화를 꼽으라면 흔히 <매트릭스>를 떠올리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올드보이> 역시 <매트릭스> 이상으로 철학적이다. 어떤 점에서 그렇냐 하면, 진정으로 철학적인 사고방식이 영화 속 사건 전개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단, 차이가 있다면, <매트릭스>는 여러 철학적인 사고방식들이 하나의 영화에 한꺼번에 결부되어 있고, <올드보이>는 핵심적인 것 하나만 결부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매트릭스>는 <올드보이>보다 철학적인 사고를 자극한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올드보이>도 '철학적'이라는 점에서는 이를 보완할만한 강력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올드보이>에서 핵심적인 반전의 장치는 가장 철학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생각의 정수라는 점이다. <올드보이>의 어떤 내용이 그토록 철학의 근본적인 생각의 태도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영화로 읽는 윤리학이야기>에서 이 내용은 이미 충분히 지적했듯이 그 핵심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올드보이> 영화를 봤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서 책(윤리학)도 읽었다면 다음의 대사가 그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금방 알 것이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인셉션>이나 <큐브>, 혹은 <이퀼리브리엄>과 같은 영화가 더 철학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혹은 다른 영화라도 좋다. 그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나 다른 주요 인물이 어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에 헤맨다면 여러분은 그 영화가 철학적 영화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 생각과 대비해서 <올드보이>가 철학적이라고 말하는 내 생각이 더 옳다고 주장하는 관점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철학을 하나의 문제풀이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에 비해서 수학은 문제풀이에 가깝다. 영어 문법에 대한 문제를 푼다면 그것은 수학에 대한 것이 아니다. 철학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철학 책에서 다루는 문제를 논의하면 철학이고 그렇지 않으면 철학이 아닌 것으로 오해된다. 하지만 철학은 '어떤 문제를 푸느냐?'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풀든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에 관련된다. 철학이 모든 학문의 근본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어떤 학문이든 학적인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그 문제풀이를 올바르게 하는 방식에 대해서 철학이 탐구하기 때문이다. <올드보이>의 중요한 소재 중 하나는 근친상간이다. 근친상간의 문제도 철학자들이 다룰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더 많이 다루는 학자들은 인류학자들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올드보이>는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굳이 '철학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 만일 영화가 얼마나 철학적인지를 따지고 싶어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굳이 철학을 따져야 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단지 이 문서가 철학을 다루는 사이트에 포함된다는 이유로? 그럴 듯 하기는 하지만, 필연적인 이유는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문제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올드보이>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올드보이>의 원작 만화가 먼저 있고, 그 내용을 각색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영화를 폄하하기도 한다. 적어도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런 주장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내가 "올드보이"라는 일본 원작 만화를 읽어 보니, 영화 <올드보이>는 원작이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폄하될 수 있는 사례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에 대해서 말을 좀 해 볼까....?
<올드보이>의 만화 원작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은 원작이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그 가치가 반감된다는 것이었다.(적어도 인터넷에서 나는 그런 글을 여러 번 봤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별로 그렇지 않다. 물론 원작이 없이 완전히 감독이 자기 능력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보다는 조금이라도 가치가 덜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반감'된다고 하기에는 영화와 만화 원작은 매우 다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교적 사소한 부분에서 동일하고, 비교적 중요한 부분에서 다르다. 같은 부분은 이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이 사설 감옥소에서 영문도 모른 채 오래 동안 갇혀있던 주인공이 풀려나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다른 부분은 이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 특히, 주인공을 사설감옥소에 가둔 이유이다. 이렇게 보면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비슷하지만 끝만 조금 다르게 만든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훌륭한 이야기는 수미일관적이고, 전체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잘 만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 속의 핵심 소품 하나도 바꾸기 어려울 만큼 유기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이현비(2004)는 <재미의 경계>라는 책에서 이것을 "정교한 짜임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만하다. 흔히 '김 빠지는 영화'는 어떻냐하면, 멋지게 시작했다가 용두사미로 끝난다. 한 예로 미국 영화 <나는 전설이다>나 한국영화 <초능력자> 같은 것들이 그런 예들이다. 앞 부분만 멋지다고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앞 부분만 비슷하다고 동일하게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용두사미'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사실, 만화 <올드보이>는 영화에 비해서 상당히 용두사미이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을 감금한 친구를 만나서 그 이유를 알아냈을 때, 나는 별로 동감도 잘 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서 영화 <올드보이>는 전혀 다른 내용이며, 극의 전개도 훨씬 더 치밀하고 또 강력한 반전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가 볼 때 영화 <올드보이>는 만화 원작과 최소 70% 이상 다른 작품이며, 훨씬 더 나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글의 초점인 '철학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화의 이야기 구조에서는 별로 철학적인 대목이 없다. 그저 사설 감금소게 갇혀 있었다는 것, 그래서 왜 자신을 가두었는지를 찾아헤맨다는 것은 철학적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을 가둔 이유에 도달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련되든 그렇지 않든, 별로 '철학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판적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어떤 내용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영화 <올드보이>는 상당히 철학적인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진(유지태)의 대사가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잘못된 물음으로 잘못된 대답에 도달했다는 주장을 한 유명한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은 "그림이론"으로 호칭되는데, 그 사상의 기본 가정은, 형이상학을 다룬 많은 철학자들이 대답될 수 없는 물음을 묻고 답을 찾아 헤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잘못된 물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사고의 도구인 언어를 분석하고, 그 언어의 구조를 나름대로 제시하였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이다. <올드보이> 영화 자체는 별로 철학적인 체 하지 않는다. <매트릭스>나 <공각기동대>와 이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두 영화는 그 이야기 구조도 철학적인 사고방식을 포함하지만, 대사나 세부적인 요소들이 여전히 철학적인 것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나쁘지는 않지만 '철학적인 체'한다. 물론 나쁘게 철학적인 체하는 영화도 있다. 나는 대표적인 예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꼽는다.
<올드보이>는 얼핏 보면 무슨 스릴러물처럼도 보이고 액션물로도 보인다. 예를 들어서 주인공(최민식)이 사설감옥소에 쳐들어가서 망치 싸움을 보여주는 장면도 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사실, 무술을 좀 아는 입장에서 가만히 보면 이런 액션은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다.(이에 비해서 <아저씨>에서 보여주는 원빈의 싸움 기술은 실제로 쓸 수 있는 기법들이다.) 영화가 대중 오락물이 되기 위한 진부한 공식 중 하나는 폭력과 관능이다. 이 점에서 <올드보이>는 야한 장면도 적절히 보여준다.
처음 볼 때는 이런 장면들이 정말 '괜히 볼 거리를 만들어 넣기 위해서' 덧붙여진 장면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 보고 나서 전체 이야기의 구조를 알면, 이현비(2004)가 말한 것처럼 "정교한 짜임새"의 관점"에서 이 장면들이 매우 필요불가결하게 들어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대단원의 절정에서 전혀 철학적이지 않던 영화가 매우 철학적이게 되는 것이다. 혹시나 오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말하는데, 그 '철학적'이라는 것은 '근친상간'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근친상간'과 같은 자극적인 소재만 다루면 다 철학적이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람들도 본 적이 있다. 그런 생각들은 '철학적'이라는 것을 학문적으로 정확한 개념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불명화하게 생각하는 통념에 기초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박찬욱' 감독이란 사람을 정확히 인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동경비구역 JSA>도 박찬욱 감독이 만든 것임을 알고 더욱 더 인상깊게 기억했다. 왜냐하면 <JSA>를 보면서 나는 카메라 조작과 편집이 매우 잘 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그 두 작품만으로 평가한 박찬욱 감독은 '상당히 역량있는' 감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기대한 다음 작품인 <친절한 금자씨>를 보고 실망했다. 박찬욱 감독이 역량은 있는데, 자기 자신만의 예술관에 빠져서 관객을 도외시하는 방향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올드보이> 정도에서 조금 자극적이게 처리하던 영상들을 <친절한 금자씨>에서부터는 불필요하게 과장하고 선정적으로 표출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래서 '절제'를 잃는 것이다. 내가 볼 때 그것은 박찬욱 감독 자신이 어느 정도 '신념'과 유사한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영화 개념, 혹은 예술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이후의 작품들이 다소 대중적으로 실패한다고 해도 박감독이 그 요소들을 포기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안타까운 사실이다.-_-; 충무로 일대 사건으로 꼽히는 강혜정의 성형수술과 함께.
|
|
처음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