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깨비의 박사논문

I. 서 론

I-1. 논문의 과제와 목적

이 논문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양상논리에 대한 “크립키 모형이론(Kripke model theory)”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관계적 의미론(relational semantics)”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가능세계 의미론(PWS)의 발전사를 고찰하고 그와 관련한 필자의 몇 가지 비판적 물음 및 주장들을 제시할 것이다. 그 물음은 PWS의 발전사에서 나타나는 여러 체계들이 양상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비교고찰적 물음이다. 이것은 다시 각 체계들이 논리적 필연성, 고정지시어, 바르칸 식에 대한 해석 등에 대해 어떤 입장을 제시했는가라는 물음으로 구체화된다. 이런 논점들은 양상을 의미론적으로 형식화하는 데에 핵심적인 문제들이며, 전체 PWS의 발전사의 많은 부분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기 위한 논점들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논문은 전체적으로 논리학사에 대한 논문이다.

논리학과 수학 교과서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학문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 없거나 매우 적게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그렇지 않다. 멀리 찾지 않고 철학만을 보더라도, 철학 이해의 중요한 부분은 바로 철학사의 이해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대한 강의록 제목이 “오르가논(Organon)”이라고 불릴 만큼 논리학은 도구적인 성격이 강하다. 분석철학에서 논리학의 이 도구적 성격은 극적으로 강조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학의 역사 역시 논리학에 관심있는 모든 학자들이 알아야 할 내용들이다.

가능세계 의미론(PWS)의 역사는 짧다. 카르납(R. Carnap)을 기점으로 현재까지를 생각할 때 대략 60년 남짓하다. 만약 카르납에서 크립키(S. Kripke)의 핵심 연구까지를 생각한다면, 약 20년 가량에 불과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 주로 고찰할 PWS의 발전사는 그 중에서도 겨우 16년 안에 이루어진 논리학의 발전사이다. 2000년 역사를 가진 철학이나 논리학 전체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에 매우 짧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발전하는 철학과 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가능세계 의미론(PWS)이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철학에서는 주요 형이상학적 개념들에 대한 분석철학적 접근을 시도함에 있어서는 가능세계 형이상학이 기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고 그 기초는 논리학에서 발전한 PWS이다. 논리학에서도 양상 논리뿐만이 아니라 시제 논리, 의무 논리, 조건문 논리, 동적 논리 등에서 PWS는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PWS의 발전사 이해를 통해서 그 근본적 아이디어의 변화를 통찰하는 것이 미래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필자는 그런 목적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한다.

PWS의 발전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코플랜드(B. J. Copeland[2002])와 골드블라트(R. Goldblatt[2003])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불과 세저버그(R. Bull & K. Segerberg[1989])의 서론에서 간략한 정리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코플랜드[2002]는 문헌 중심의 역사적 사실들을 포괄적으로 정리한 연구이다. 그 안에서 PWS의 발전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PWS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언급된 문헌들을 새로이 읽고 연구해야 할 만큼 상세한 철학적 고찰은 부족하다. 골드블라트[2003]는 순수 논리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PWS의 수학적 측면, 혹은 수학과의 연관성을 역사적으로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이들 기존 연구의 틈새에서 연구의 의의를 찾고자 하는데, 그것은 1) PWS의 논리학적인 측면에서의 기본 아이디어의 역사를 추적하고, 2) 그와 관련된 (모든 연구를 취합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학자들만의 연구를 선별해서 그 상세한 내용을 정리하며, 3) 그 속에서 철학적 쟁점을 발견하고 이 쟁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하여 필자의 입장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달성하고자 한다.

1) 양상 논리에 대한 PWS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8명의 학자들의 연구내용을 개괄하고,

2) 다양하게 표현된 논리학자들의 PWS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형식화된 체계로 구성해 보며,

3) 서로 다른 표기법으로 혼란스러운 여러 논리학자들의 의미론 체계들을 오늘날 주로 쓰이는 통일된 표기법으로 표기하여 그 생각의 차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여준다.

4) 이 과정에서 각각의 PWS이 양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형식화하였는지 비판적으로 비교고찰한다.

이 논문의 본론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의 두 부분은 PWS의 발전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내용이고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PWS 발전사에서의 여러 쟁점들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이다. 필자는 PWS의 발전사에 대한 고찰을 ‘발상의 단계’와 ‘체계화의 단계’로 구분하였다. 발상의 단계는 카르납, 폰라이트, 프라이어, 메르디쓰를 중심으로 정리되는데, 현대 PWS 의미론 발전의 중요한 동기들이 나타나는 과정이 그 핵심이다. 체계화의 단계는 캥어, 몬태규, 힌티카, 크립키를 중심으로 한다. 세 번째 장에서는 역사적 고찰에 기초해서 그 발전사와 관련된 쟁점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모든 논의는 이 논문 전체가 논리학사에 대한 논문이므로 역사적인 해석과 평가에 한정될 것이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줄곧 형식화된 양상 의미론이 발전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종착점인 크립키 의미론을 기준점으로 평가하였다. 따라서 그 반대 급부로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갖게 된다.

1) 이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고찰하는 학자들의 연구내용은 필자의 관점에 의해서 취사선택되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선택된 것은 아니고 PWS의 발전에 중요하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학자들 소수에 집중될 뿐이다. 예를 들어서 맥킨지(McKinsey)나 베커(Becker), 혹은 드레이크(Drake) 등의 학자들은 코플랜드[2002]에서 다루어지지만 이 논문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2) 이 논문에서 언급하는 각 학자들의 포괄적인 사상과 관련된 내용이나 철학적 활동의 사실관계에 대한 고찰은 이 연구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다. 코플랜드[2002]는 이런 점에서 완벽한 대안일 수 있다. 코플랜드[2002]에 근거해서 여러 사실들에 대한 사소한 언급은 이 논문에서 더해질 것이다.

3) 수학적인 측면은 깊이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논문에서 양상논리의 형식체계에 대한 고찰은 의도적으로 수학과는 구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양상논리와 관련이 깊은 수학적 연구들에 대한 고찰 역시 제외되었다. 따라서 예를 들어, 관계적 의미론(relational semantics)과 관련 깊은 수학적 연구인 존슨과 타르스키(Jónsson and Tarski[1951])에 대한 고찰 역시 제외되었다. 골드블라트[2003]은 이 점에서 완벽한 대안일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