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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97년 1월에 서울대에서 실시하는 스키 강좌에 참석한 후, 그 감흥을 적어서 같이 스키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 그리고 후배들에게 선물로 줬던 글입니다.

서울대 스키 강의를 들으려는 분들은 참고로 보세요. 다른 분들은 그냥 재미있게 보시구요.^^'


그 겨울의 4박5일을 기억하세요?

-파깨비 씀-

  

따뜻한 봄은 겨울의 기억들을 녹이면서 분다. 억세고 강한 겨울 바람이 아로새겨 단단히 얼어붙은 기억들을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지울 수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또, 화사한 봄에 겨울의 추운 기억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기도 하지. 하지만 나에게는, 아니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인 ‘우리’에게는 화사한 봄 이상의 화려한 겨울의 기억이 있다. 하얀 눈밭에서 피부가 거슬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뒹굴던 기억이…

“포르그 보겐은 스키에서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자세예요. 어느 정도냐면, 스키 선수들도 가끔씩 자세가 잘 안되면 포르그 보겐을 연습하곤 해요.”

열을 올리면서 설명을 하던 강사의 모습. 어딘지 어슬프고 앳된 표정들이 아직은 사람들을 가르쳐 본 경험이 많지는 않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었었지. 까만 옷에 머리에는 아줌마 스타일의 스카프를 두르고 까만 썬글라스를 썼었다.

“…자, 그러면 맨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포르그 보겐 자세로 내려가는데, 저기 보이는 주황색 표지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세요.”

그러면 떼지어 선 20~30명의 학생들이 옆걸음으로 눈비탈을 기어오르면서 맨 첫사람이 출발한 자리에서부터 한명씩 조심스럽게 포르그 보겐 자세로 눈길을 헤친다.

“이봐요, 손 자세가 중요하다고 그랬죠? 또 닭다리!”

앞에 가던 한 남학생이 주의를 받는다. 그 옆으로는 노란 병아리 한마리가 귀여운 스키를 타고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다.

…울긋불긋한 겨울의 추억들…

제대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연세대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외국인 및 교포들과 함께 우리가 이번에 갔던 알프스 리조트에 스키를 타러 갔었다. 내 동기 몇몇은 부대에서 스키 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난 그럴 기회가 없었다.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간 첫 스키는 너무 재미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스키 자세에 대해서 설명을 듣는 한나절 동안 나는 10분 정도 들은 설명만을 머리 속에 곱씹으며 바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서 끊임없이 비탈을 굴러 내렸다. 그 첫날 하루 종일 나는 정말 스키를 타면서 넘어질 수 있는 모든 자세를 다 경험했다. 겁없이 속력을 내다가 힘차게 구르고 나면, 우스운 만화책에서 봄직한 모습으로 나는 눈밭에 꽂혔었다. 데굴데굴 굴러서 눈 속에 처박힌 머리를 들면 내 옷 속으로 눈이 한아름 들어와서 녹고 있고 스키 한짝은 저쪽에, 다른 한짝은 이쪽에, 그리고 스틱도 하나는 저기에 꽂혀있고 다른 하나는 이쪽에 던져져 있고… 하지만 그 다음날에 나는 중급자 비탈에서 자유롭게 스키를 타고 다녔다. 그러자 그 때 같이 스키를 타던 동료들이,

“와, 역시 특수부대 출신의 운동 신경은 대단하군요!”

그리고 이번에는 강사로부터 그렇게 함부로 스키를 배우면 안된다고 단단히 경고를 먹었지.

차근차근히 한명씩 강사의 지시대로 하루 종일 옆걸음으로 비탈을 기어오르면서 포르그 보겐 자세로 미끄러져 내린다는 것은 정말, 정~말 김빠지는 일이었다. 내가 꿈꾸는 즐거움은 매끈하고 세련된 아름다움보다는, 때로는 고통과 작은 슬픔과 공포가 따르더라도 그것들을 헤치면서 하나의 가파른 고개를 넘어서 항상 새로운 도전을 해 나가는 짜릿한 흥분인데.

“자, 잘 했어요. 그런데, 모두들 다 잘 하는데, 역시 팔 자세가 잘 안돼요. 제일 많은 문제점이 닭다리 자세, 그리고 리어카 자세, 팔 자세가 왜 중요한지는 말씀을 드렸죠?”

그 때 꼭대기에서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와서 내 옆에 서는 학생이 있었다.

“어디 갔다 오는 겁니까?”

“아, 예. 아까 멈추지를 못하고 끝까지 내려가는 바람에 다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가 찾아오는 길이예요.”

그래! 저런 수도 있었군.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나도 틈틈이 우리 조 사람들을 피해서 여기저기로 쏘다니며 속도감을 즐기곤 했다.

원래 나는 중급자까지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어차피 교양 학점이야 필요없는 것이고, 단지 자유롭게 스키를 탈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초급자는 리프트를 탈 수 있는 기간이 훨씬 적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중급으로 올려서 신청했다. 그러자 신청을 받던 조교가 무슨 영어같은 말로 뭐뭐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아마 포르그 보겐 아니면 웨데른 같은 거였을 것이다. 나는 무표정하게 대답했었다.

“그럼요.”

나는 스키복을 친구로부터 빌리지 못했다. 작년에는 하이포라 재질의 등산복을 빌려 입었었는데, 이번에는 그것도 안돼서 그냥 태권도부 땀복을 껴 입었다. 꼭 스키복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아니까. 단지 눈에 뒹굴었을 때 옷이 젖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을 뿐이니까. 태권도부 땀복이니까 등 뒤에 “서울대학교”라는 글짜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데, 그게 꼭 체육과 학생처럼 보이게 하는 모양이었다.

“등에 학교 글자가 있어서 나는 선배님이 혹시 체육과 스키부 학생이 아닐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처음 스키를 순서대로 탈 때 제일 먼저 넘어지더라구요. 그래서 스키부는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 말을 했던 얄미운 학생이 누구였더라…?

“스키 연습의 3법칙,

첫째, 스키를 타면 넘어지게 마련이다.

둘째, 때로는 가만히 서 있다가도 넘어진다.

셋째, 아무리 잘타더라도 부딪혀서 넘어진다.”

 

한번은 우리 조 강사와 같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면서 내가 얘기를 해 주었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시간도 알고 보면 꽤 긴 편이다. 그러자 강사도 만득이 시리즈 몇가지를 내게 들려 주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로 삼행시 짓는 것 알아요?”

나는 강사가 몇학번일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지만 강사는 그 때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리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나보다도 훨씬 어리겠지. 그래서 굳이 묻지 않았다.

스키의 3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 중에서 가장 믿기지 않는 것이 2법칙인데, 스키를 타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자, 이제부터는 프로그 화렌을 연습해 보겠습니다. 화렌은…”

한 줄로 나란히 비탈의 변두리에 서서 강사의 설명을 듣던 학생들이 갑자기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2법칙 때문이다. 그냥 서 있다가 넘어지는 것.

“자, 그러면 다시 또 순서대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맨 앞에 반장부터 출발하세요.”

“어디까지요? 저기 뼝아리 있는데까지 말입니까?”

“뼝아리라뇨?”

“저기, 뼝아리처럼 노란 옷 입은 얼라~들 말입니다.”

“네, 저기까지 가서 서세요.”

리라 초등학교 학생들이 우리랑 같이 스키를 타러 왔었는데 그 애들이 모두 노란 외투를 입고 있었고 노란 모자를 썼다. 멀리서 보면, 아니 가까이서 봐도 병아리 같이 보인다. 그게 그만 우리끼리의 통용어가 되었다.

내가 반장이 된 것은 강사의 말대로라면 학번이 높기 때문이지만(92학번), 어쩌면 강사가 내가 자꾸 농땡이 부리면서 혼자서 리프트타고 엉뚱한 데로 놀러다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리프트 값도 아깝고, 기다리는 것은 질색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우리 조가 리프트를 타러 내려갈 때 항상 고속으로 내려가서 위쪽에 모일 때는 맨 마지막에 도착하곤 했었다. 그 사이에 한번 더 리프트를 타고 고속으로 내려꽂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을 고의로 속이고 놀러다닌 적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그만큼 나는 모범학생이었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저, 제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서 좀 바꿔 신고 오겠습니다. 강사님.”

“신발이 어떻게 안 좋은데요?”

“자꾸 풀려요.”

“…그래요? 빨리 갈아신고 오세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직선으로 비탈을 내려 꽂았다. 역시 속도감이 있어야 재미있단 말야. 그리고서는 같이 온 태권도부 후배들을 찾아다니면서 잠시 놀았다.

“저, 제가 머리가 좀 띵해서 약을 먹고 오겠습니다.”

“아니, 반장님이 없으면 어떡해요?”

“금방 오도록 하죠.”

그리곤 다시 또 직선으로 내리 꽂았다. 그랬기 때문에 일찌감치 날 반장을 시켰나?

“누가 조 반장을 좀 맡아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이창후 씨. 학번이 제일 높으니까 반장을 좀 맡아주지 않으실래요?”

원래 계획은 스키를 타러 온 첫날은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그 다음날부터는 태권도부 후배들과 어울려서 놀기로 했었다. 거기서 내가 특수부대 방식으로 애들을 연습시킬 계획이었다. 다른게 아니라 무조건 높은 곳에 갖다 놓고 죽든 살든 내려가라고 하는 것.

“…글쎄요, 가능하면 학번이 비슷한 사람이 반장을 해야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하기 싫으세요? 가능하면 반장을 해 주세요.”

내가 반장을 하다가 말 안듣는 사람이 생겨서 성질나면 큰일 나는데.

“정말, …하기 싫으세요?”

강사가 여자가 아니었으면 난 반장 같은 걸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 선생님이, 그것도 애처로운 표정으로(그 때 내 생각이 그랬는데, 아마도 강사의 심리작전이었을 것이다.) 부탁을 하는 바람에 나는 마지못해 승낙하고 말았다. 하지만 말 안듣는 사람도 하나도 없었고-사실, 우리 조 학생들은 말을 너무 잘 들어서 싱겁기까지 하다. 가끔은 티각태각하는 맛도 있어야 재밌는데.- 덕분에 나도 재미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자, 다 도착하셨으면 위로 밀착하세요. 그리고 뒤로 밀착도 하시구요!”

학생들 중에 여학생이 없었더라면 아예 또 군대에서 태권도 교관하던 버릇이 나와버리지는 않았을까.

내가 고급자 리프트를 처음 탈 때의 기분이 생각난다. 챔피언 코스라고 해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경로였는데 또 가장 높기도 했다.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체육과 준석이란 후배가 거기엘 꼭 올라보라고 권유했고 나도 그럴 계획이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리프트를 탔다. 준석이 녀석은 이번에 처음 스키를 배웠는데 체육과생 답게 금새 수준을 높여서 고급자과정을 마음대로 누비고 있었다. 난 속으로 은근히 샘이 나서 태연한 척, 그래 나도 갈께, 그랬는데… 맨 마지막에 꼭대기에 도착할 때 쯤에는 다소 비장한 느낌마저 들기도 했다.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는 하얀 산들은 아름다왔지. 이젠 저 절벽같은 비탈을 헤치고 내려가야 하지만.

높은 곳엘 오르면 항상 예전의 핏발같은 기억들이 덮어누르는 시간의 갈라진 틈을 비집고 솟아오른다. 까마득한 공중에 뜬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보던 아름다운 산과 들의, 하지만 아름답기 보다는 비장했던 모습들. 깍아지른 절벽의 꼭대기에서 밧줄 하나를 의지하고 거꾸로 매달려서 뛰어내리며 살피던 푸른 하늘. 모두가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지금 이 하얀 비탈의 기억도 돌아가고픈 기억으로 남으리라.

챔피언 코스는 두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완경사를 둘러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급경사를 헤쳐 나가는 것이다. 완경사를 둘러가는 길은 굴곡이 심하고 한쪽은 암벽, 다른 한쪽은 안전 그물이 별로 없는 듯한 절벽이었다. 그 모습들이 섬짓하게 느껴진다. 급경사 쪽도 안전 그물이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 경사 자체가 더 위협적이다. 처음에 난 둘러가는 길을 내려갔는데, 꽤 긴 길이었고 재미있었다. 서툰 스키 실력으로 내려가자니 상당히 많은 체력이 필요했지만 난 별로 넘어지지 않고 무난히 길을 헤칠 수 있었다. 역시 한번 길을 내려오고 나니까 훨씬 마음의 부담이 줄었다. 그 다음부터는 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길까지 익숙하니까 꽤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가 태권도부 후배 한명을 만났다. 그 이름도 찬란한 ‘준원’이라고. 나는 걔를 꼬드려서 스키에 자신감을 갖게 해 주겠다며 단계적으로 연습하고자 먼저 초급과정을 같이 올랐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노라니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파깨비(파란 도깨비의 준말) 형!”

올려다 보니 성환이 녀석이 상급자 과정을 올라가고 있었다. 저 녀석 아직 중급자 과정도 잘 못탄다더니.

“야! 우리도 곧 올라갈께! 중간에서 기다려!”

우리는 초급자 과정을 재빨리 내려와서 다시 파라다이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막 리프트를 타고 조용히 올라갈 때 준원이 녀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이, 정말 내가 실수 하는거 아냐?”

상급자 과정도 꽤 높아보였지만 고급자 과정보다는 훨씬 여유있어 보였다.

“내가 혹시 악마의 꾐에 빠진 거 아냐?”

누구나 겁만 집어먹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스키 자세를 유지함으로써 충분히 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물론 그 ‘기본 스키 자세’도 안되긴 하지만.

“…아이구 이거, 아무래도 내가 악마의 꾐에 빠진 것 같은데…”

나는 녀석이 농담을 하느니 생각했다.

“자, 스스로 겁을 먹기 전에 과감하게 해치고 나가야 한다. ‘비켜요!’라고 크게 소리치면서, 알았냐? 자, 출발!”

준원이 녀석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억지로 출발했다. 걸어서 내려가는 길이란 어차피 없으니까. 그러다가 쿵 넘어진다. 내가 그 옆에 내려가서 섰다.

“야, 과감하게 하란 말이야. 저기까지만 가서 다시 넘어져, 알았냐?”

그러나 이 불쌍한 후배 녀석은 잠시 후에 다시 넘어지더니 아예 일어나지를 못했다. 다쳐서 그런게 아니라 겁을 집어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까 성환이더러 기다리라고 한 곳까지 먼저 내려가서 준원이를 기다렸다. 비교적 비탈이 많이 진 부분에서 준원이 녀석이 넘어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그 뿐만 아니라 누운 채로 주섬주섬 스키를 벗더니 손에 스키와 스틱을 잡고 기어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아이구, 말도 마시예, 형님. 저도 아까 엉금엉금 내려오는데 패트롤이 지나가면서 ‘만약 또 올라오면 리프트권 뺏겠어요’하고 지나가데예.”

“야! 이녀석아! 과감하게 일어서란 말야!”

내가 아무리 소리쳐도 불쌍한 후배놈은 누운 채 손에 든 스키로 눈을 긁으며 내려왔다. 그리고는 초급자 과정 출발점까지 내려와서 일어서며 말했다.

“역시 내 예감이 적중했어. 난 악마의 꾐에 빠졌던 거야. 다시는 내가 저걸 타나 봐라!”

그게 이번 스키 연습 최대의 사건이었다.

내가 보기에 후배 녀석들은 너무 겁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 내가 계획했던 ‘강한 훈련’은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 너희들 수준에서 웬만큼 눈 속에 넘어져도 절대로 다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아무리 타일러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엔 넘어졌다. 일부러 넘어지려 하면 오히려 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터득하지 못했다. 젠장… 스키를 타러 오기 전에 이야기했던 것, 목숨이 경각에 달한 위태위태한 속에서 눈에 핏발이 서야만 각자의 깊은 곳에서 잠자는 동물적 본능이 눈을 뜬다는 것, 절대절명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상당한 공포감 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안쪽으로 침잠하여 세상을 움직여 나간다는 말들이 모두 공허한 말장난이 되어버리고 있었다. 거기에 각자가 속한 정규 스키 강의에 모두들 학점도 받지 않을 거면서 얽매여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도 우리 조에서 계획된 것 이상으로 많이 활동하게 되었다.

금요일 시험을 치던 날에는 다시 초금, 중금, 상급, 고급 과정을 순서적으로 헤매고 다녔는데, 상급자 과정에서 우리 조 여학생을 만났다. 음대 학생이었던가? 같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 겁먹지 말고, 겁먹지 않겠지만, 차근차근히 포르그 보겐 자세로 내려가세요. 제가 뒤따라 가면서 필요한 경우에 도와드릴테니까.”

그 여학생은 별로 겁먹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리고 비교적 잘 내려갔다. 거기서 헤매다 누운 채 내려간 내 후배 녀석 보다도 더 잘. 하지만 중간에 눈이 쌓이고 얼어서 뭉쳐진 부분에서 넘어졌다. 그 때는 내가 밑에서 기다릴 때였는데 나한테 와서 부딪히면서 같이 넘어졌다. 스키 제 3법칙, 아무리 잘 타도 부딪혀서 넘어진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아주 잘타는 사람이 되어버리겠지? 그 덕분에 나도 스키가 벗겨져서 한참을 헤매었는데, 거기는 경사가 급해서 스키가 벗겨져서 넘어지니까 아주 곤란하더만. 나는 저 위쪽에 흩어진 그 여학생의 스키를 간신히 찾아왔다. 그 때 내 머리 속에서 맴돌던 생각이란, …글쎄, 나하고 나이가 비슷한 예쁜 여학생이었으면 훨씬 즐거울텐데, 이게 예쁘면 뭘해, 어린애인걸… 그 여학생이 96학번이었다. 난 왜 항상 어딜 가면 어린애들이랑 놀게 될까?

그 후에는 일어서서 그 여학생이 잘 타고 내려갔는데, 의욕이 확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리프트를 타지 않으려고 줄 바깥에 서서 스키를 그만 타고 콘도로 들어가겠단다. 다시 제가 도와드릴테니까 같이 타시죠. 내가 몇번 권유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난 굳이 만류할 수가 없었다. 우연히 같은 조였던 여학생일 뿐이니까. 같은 써클 후배이거나 했으면 많은 얘기를 해서 구슬렸을 것이다. 어린애지만 예쁜 여학생이 같이 타면 혼자서 타는 것보다는 재미있을테니까.

스키를 타러 오기 전에 후배들과 얘기했었지. 우리가 스키를 타러 간다는 것은 단지 고급 스포츠를 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지 못한 불편함을 모두 이겨 내면서 새로운 경험 속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웃고 다투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나중에 각자가 훌륭한 위치에 서면 언제나 비싼 장비와 비싼 식사, 편안한 여건에서 스키를 즐길 기회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다소 불편한 여건에서 대여한 장비로 많은 제약 속에서 눈길을 헤치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넘어지고 뒹굴고 그러다가 점점 나아지는 즐거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긴 이것도 모두 나의 생각 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을 테니까.

토요일날에도 상급자 과정에서 다른 우리 조 여학생을 한명 또 만났다. 그 여학생은 정말 배운 ‘그대로’ 타는 사람이었는데, 정말 상급자 과정의 비탈을 프르그 보겐 하나만으로 헤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이 타는 걸 옆에서 보면 웬지 아슬아슬해 보이는데 절대로 넘어지지 않고 잘 내려갔다. 나처럼 막무가내로 배운 사람으로서는 경탄할 수 밖에 없는 여학생이었지. 이름이 ‘은정’이라고 그랬지. 저 기술이 정말 고급자 과정에서도 통할까 궁금해서 같이 챔피언 리프트를 타자고 꼬드겼는데, 처음에는 그러자고 하더니,

“우리 조 친구들도 만났고 저는 그냥 여기서 탈래요.”

그래서 나는 다시 혼자 고급자 과정으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재미있는 것은 스키를 타는 시간만은 아니다. 저녁마다 콘도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다. 우리 방에는 과 후배 둘과 체육과 학생들, 공대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체육과 학생 둘이 나와 학번 차가 별로 나지 않아서 얘기가 잘 통했다. 어린애들은 여전히 우리가 그 또래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모이면 게임을 하면서 즐겼고 우리들 노땅들은 앉으면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했다. 체육과 90, 91학번 학생 둘 다 잘 생기고 견문도 넓은 편이어서 재미있는 얘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전직 깡패였던 후배한테서 들었던 얘기를 미끼로 후배들을 구슬려서 그 날 밤에 방팅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역시 우리같은 노땅들과는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태권도부 후배들과 같이 모여서 격투기술과 태극권, 태권도의 기술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지냈다. 그리고 밤에 잘 때는 또 불을 끄고 누워서 야한 얘기들…

그리고 아침에는 칼같이 7시에 일어나서 빠짐없이 아침을 먹는다.

마지막 토요일날에 나는 정말 겁없는 여학생을 만났다. 태권도부 후배인 옥수가 아는 여자 후배였는데, 자기도 예전에 스키를 한번 타 보았다가 이번에 상급자 과정으로 수강신청을 했대나. 그리고는 파라다이스를 타더니 갑자기 챔피언 과정을 올라갔다. 나와는 챔피언 과정에서 만났는데 정말 겁이 없었다. 절벽 사이로 둘러가는 경로를 한번 타고 나서 하는 말,

“오빠, 우리 저기로 한번 타보자.”

알프스 리조트 최고의 급경사 과정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성환이와 옥수와 눈빛을 맞추었다.

“좋지! 가 보자.”

나도 그 때 계획은 하고 있었지만 처음 타 보는 경로였다. 일단 양쪽이 역시 절벽인데 한쪽에는 그물망이 부실하게 널려있을 뿐만 아니라 스키가 아닌, 맨발로 그 경사에 서도 주체하기 어려워 보일만큼 급경사였다. 꽤 겁먹게 만드는 비탈이다.

“자, 순서대로 가보자.”

“형이 먼저 가 보세요.”

“그래, 알았어.”

나는 마음 속에 두려움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미끄러져 내려갔지만 처음이라서 그런지 움직임이 잘 통제되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중간에서 멈춰섰고 2번 정도 넘어졌다. 이게, 비탈이 심하니까 일단 넘어지고 스키가 벗겨지고 나면 정말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가만히 누워있어도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서 벗겨진 스키와 자꾸 멀어진다. 간신히 급경사를 다 내려왔을 때는 점심식사 시간이 되어서 곧 짐을 정리하고 버스를 탈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난 두번이나 넘어지면서 그 과정을 내려왔다는 것이 별로 마음에 안들었다.

“야, 성환아, 우리 점심은 포기하고 챔피언 한번 더 타자!”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올라갔다. 이번에는 길을 아니까, 정말 마음에 두려움이 퍼지기 전에… 나는 멈추지 않고 내려갔다. 빙판같은 눈길에서 스키날이 서면서 정말 배운 대로 이번에도 제동이 걸렸다. 한 두어번 제동이 마음대로 걸리자 안심이 되었고 거침없이 비탈을 돌아돌아 내려갔다. 성환이는 좀 주춤주춤하면서 내려오고 있엇다.

“야, 성환아! 빨리 내려와라! 집에 가야지!”

“알았어요, 창후 형!”

그 메아리를 뒤로 하고 나는 마지막 비탈에서 직선으로 내리 꽂으면서 속도감을 즐겼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스키였다.

한가지 중요한 기억은, 마무리 파티를 하던 날의 일이다. 그 날 저녁에 우리 중급 16조는 대강당에서 일찍 모이기로 했다. 장소는 마이크 앞.

(마이크로)“아,아, 마이크 시험중. 중급 16조, 중급 16조는 지금 당장 마이크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웃음들…

(마이크로)“아, 여기 모임이 있으니까 피아노 치시는 분은 배경음악 소리를 좀 줄여주십시오.”

또 웃음들…

“오늘이 발렌타인 데이라서 준비했는데, 하나씩 드세요.”

스키 선생님의 말씀.

“각자 소개를 하죠. …저… 저는 94학번 조소학과 학생이구요… 저번에 우리 방이랑 방팅했었죠?”

“아, 맞다. 어쩐지…”

스키를 탈 때는 항상 썬글래스를 모두 쓰고 있으니까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다.

“모두들 여기에 주소록을 써 주시고 모임이 끝나고 나면 나중에 103동 609호로 모여 주세요.”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반장으로서 한 일은 없지만 여선생님도 앙탈도 한번 안부리고 잘 도와 주셨고 다른 분들도 너무 말을 잘 들어 주셨구요.”

“아니, 국악과 학생들은 같은 동에 있으면서도 빨리 안오고 뭘 하십니까? …뭐라구요? 라면 먹고 온다구요? 다이어트도 안하세요?”

… 남들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즐거웠고 그래서 기억하고 싶은 일들이 그렇게 많은 속삭임과 웃음 속에 흩어져 있다. 아싸, 슈퍼맨, 아싸, 너,너, 아싸, 젖소부인, 아싸 쇼걸, 아싸 쇼걸, 아싸 양파링… 천정에 손을 대고 벽에 붙어 있던 기억들, 바깥에서는 한두장의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하얀 눈 위에 더 하얗게 때묻은 우리들의 4박 5일을 녹지 않게 어루만지면서 찬 바람이 불어가고 있었는데. 자 한잔 하시죠. 양주와 간단한 안주를 사이에 두고 밤새도록 정다운 이야기의 끝을 달리고 싶었지만, 내일 또 마지막으로 눈 밭을 달려야 할테니까. 허준석과 문지욱이라는 두 멋진 새 후배의 이름을 배개밑에 묻고 억지로 눈을 붙였던 기억들.

“저, 잠깐만요. 이번에 강사로서 수고하셨다고 학생들끼리 정성을 모아서 작은 선물을 마련했거든요.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는데…”

“와, 너무 예쁘다! 정말 고마와요.”

거기에 우리 조 학생들 모두가 다 있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은 다 모여 있었을 것이다.

이젠 곧 학교 교정에 찬란한 꽃들이 피겠지. 그 봄의 모습은 멀지도 않은 우리 겨울의 아름다움을 가리겠지만 또 언젠가는 여름의 정열과 가을의 풍요로움을 건너서 겨울의 신선함이 다가오면 지금 봄에 취한 우리의 마음은 다시 또 하얀 전설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 때 그 넓은 눈밭에서 관악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이 눈을 녹이지 않는 겨울의 젊음을 태운 적이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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