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비가 오면
모든 것이 젖는 힘겨움이 있었지만
어느 한순간부터
비와 함께 내 기억 속에서는 짧은 시가 들리기 시작했다.
시를 들려 주는 그 비의 이름은 ‘수민’(가명)이다.
그래서 이름 속에 물을 생각하게 하는
한 글자가 한가운데 앉아있었나.
김수민? 내가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친척 여동생들이었다. 지난
크리스마스날 영화를 보여주면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그리고 수민이, 혜민이, 호민이가
어린 국민학생이거나 유치원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아이일 때 걔들을 처음 만났다. 성은 다르구나. 저 사람은 왜 단발머리로
얼굴을 가리듯이 하고 있을까?
……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귀찮았어요. 그래서 항상 혼자서 머리칼 속에 얼굴을 묻고 앉아 있는거죠.
가끔씩 네비게이터나 대순진리회 같은 사람들이 다가와서 말을 걸어요. 그러면 제가 ‘제발 그냥 가세요!’라고 말하고, 그럼
그들은 대부분 경계심을 갖고 슬며서 가버려요. 오빠한테 종교가 뭐냐고 물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외모의 특징이 그랬다. 조금 말라 보이는 몸매무새에 큰 키, 전혀 꾸밈새 없는 옷차림, 요즘은
보기 드문 단발머리, … 그리고 항상 혼자서 강의를 듣고 사라지는, 뭐랄까, 차가운 애처로움.
매일 빠짐없이 강의를 들어왔고, 조금은 강의가 힘겨운 듯 보였는데, …하긴 누구에게나 그
강의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특이하게 보였던 것은 쉽게 힘겨움을 나타내지도 않는 절제와 또다른 마음의 무게가
엉켜서 차분한 분위기를 흩뿌리고 있었다는 것.
“제가 보기에 그랬습니다. 혹시 이런 성격 아니세요? 친구들과 잘 친하지만 친구들에게 친절한
가운데서도 마음 속에서는 쉽게 융합하지 못하고 외따로 떨어진 혼자만의 영역을 가진 사람, 자존심은 강하지만 그걸 남에게
드러나지 않게 하려하면서 그래서 오히려 남에게 더 친절한 성격.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목표와 이상이 좀 높은
것은 아닌가고 느끼며 그와 더불어 ‘눈이 높다’고나 할까, 그런 것. 그 사이에서 현실과의 격차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다가
두갈래로 나뉘어지는데, 한 경우는 현실에 집착하면서 아주 현실적이 되고 다른 경우에는 이상에 집착해서 현실적으로 다소
공허한 사람이 되기도 하죠. 주로 이 양자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지만 수민씨는 후자의 성격이 더 강한 사람으로 보이는
군요. ……”
“그런게 있죠. 누구나 그렇듯이 저도 저랑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이런
분이 아니냐고 물어 본 거구. …”
“철학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죠?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
한가지 우스웠고 재미있었던 모습이 기억난다. 내가 수민이의 성격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물었을
때 그 사람이 종이를 꺼내더니 볼펜으로 번호를 메기고 받아적으려고 준비하던 모습이.
“저, 지금 혹시 시간이 있으십니까? 저랑 얘기 좀 할 수 있나요?”
대학교 1학년 때 어떤 사람에게 ‘얘기 좀 할 수 있나요?’라고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만인가?
비가 오고 있었다. 아침에는 비가 올 것 같지 않았는데. 그리고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도 비가
많이 오지는 않았는데.
“어디로 가셔야 합니까?”
“저는 아무데나 괜찮아요. 경영대 식당에서 커피를 제가 사죠.”
하지만 우리는 음미대 식당으로 갔다.
“어차피 저는 인문대 쪽으로 가야 하는데.”
“제가 우산을 씌워드릴께요.”
……
“사실은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계속 울었어요.”
조금씩 그런 걸 느꼈다. 멀리서 보던 모습과 가까이서 보는 모습이 다르다. 그건 최근 1년이나
몇달 동안에 생활이 많이 바뀌었고 그래서 마음도 많이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제가 선물을 하나 드리죠. 이건 제가 얼마 전에 써서 출판 준비를 하고 있는 글인데, 혹시나
심심할 때 읽어 보세요. 어쩌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금방 비가 멎을까? 금방 멎겠지. 예쁜 여학생을 만났으니까.
“이 책은 제 이름으로 안나가고 필명으로 출판할 예정입니다. 필명은, 이 O O.”
……
“식사를 하실래요?”
“제가 맛있는 걸 사드리고 싶은데, 수표 밖에 없어서.”
“괜찮습니다. 저도 돈 많습니다. 저녁을 제가 사죠.”
“아뇨. 전 지금 저녁 생각은 없어요.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천만에요. 어차피 오늘 같은 날 강의가 끝나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 밥을 먹으로 갈까 말까
망설이다 시간을 허비합니다.”
“말씀을 낮추세요.”
……
“이 다음에 만나면 그 때부터 말을 놓도록 하죠.”
저녁을 혼자서 먹고 있을 때 조금 전에 봤지만 반가운 사람이 다시 왔었다. 아무래도 비가
많이 와서 우산을 씌워 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요-라고 말하며.
“지금부터 말을 놓으세요.”
“…그럼, 그럴까? 그러지 뭐.”
“그게 저도 편해요.”
……
“난 학부 때 교수님 소개로 과외를 한 적이 많아. 장점도 있지만 교수님 소개로 가니까 교수님
체면을 봐서도 보수를 많이 받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었지.”
“난 과외를 처음 소개 받아서 가면 ... 그러니까, 언제나 그렇듯이 부모님, 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모여 처음에 인사를 하잖아. 그 때…”
비가 오는 날은 많은 것이 젖는다. 그래서 귀찮고 별로 반갑지가 않다. 하지만 그 날의 비는
아주 반가운 비였다. 그 때문에 어느 고마운 아가씨와 어깨를 가까이 하고서 작은 우산 아래에서 비를 피하면서 길을 걸을
수 있었으니까.
“너, 이젠 어디로 가니? 이제 하교를 하나?”
내 연구실로 같이 걸으며 내가 물었다.
“글쎄요. 집으로 가야겠죠.”
“그럼 교문 쪽으로 가겠구나. 그러면 미안하지만 태권도장까지 좀 더 우산을 씌워주지 않을래?”
그래서 같이 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어릴 때 저도 태권도를 배우고 싶어 했어요. 동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배우고,
저는 어머니께서, 무슨 여자가 태권도를…하시는 바람에 배우지 못했죠.”
“오늘 제가 술을 한잔 사고 싶은데, 정말, 사고 싶은데, 제가 술을 마시지 못해요.”
숨김없는 마음의 표현.
“저 때문에 시간 많이 빼앗기셨죠?”
상대에 대한 꾸준한 관심.
“오늘 정말 고마와요. 덕분에 기분이 많이 나아졌어요.”
감정 표현의 억제.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내가 다른 사람의 성격과 마음을 분석한다고 거부감을 느끼면서
경계를 하기도 하지만, 수민인 알거야, 이것은 사람을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해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잊지 못하는
기억의 단편들이라는 것을. 그치?
그 때… 그 때, 우산이 좀더 작았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그 때 비가 좀더 많이 왔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그 때 인문대에서 도장까지 가는 길이 훨씬 더 멀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 때 식당에서 연구실까지 가는 길이 훨씬 더 멀었다면, 그래서 오랜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나란한 어깨로 걸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내 신발이 훨씬 더 많이 젖었을 거구 내 옷도 가방도 훨씬 더 많이 젖었겠지만
비 속에서 들려오는 시에는 예쁜 이야기가 두서넛쯤은 더 실려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어떤 운동을 좋아하니?”
“난 수영이나 배드민턴 같은 것. 오빠는요?”
“난 동그란 것하고는 좀 거리가 멀고 주로 힘들고 격렬한 운동, 태권도 같은 것.”
“테니스는 어때요?”
“테니스는 공이 동그랗잖아. 그래서 잘 못하고 대신에 배드민턴은 공이 동그랗지 않으니까,
그런대로 제법 한다.”
그래서 내가 또 그 웃음을 볼 수 있었다. 살풋 삶의 무게가 깔린 얼굴에 구름 사이로 비친
푸른 하늘처럼 지나가는 웃음을.
“난 어릴 때(중학교 때라고 말했었나? 기억이 애매하네.) 테니스를 무척 치고 싶었어요.”
중학교 때, 나도 테니스를 무척 치고 싶어 했어. 내 머리 속에서만 흐르는 그 독백이 우리의
닮은 꼴을 그려주고 있었다.
그 날, 월요일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선배님들이 오시는 날이 아니었다면 같이 술을 마시지는
못하더라도 술보다 더 진한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창 밖에 내리는 비의 모습을 즐기면서 얘기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저기가 태권도장이야.”
“네. 저는 이 쪽으로 워낙 안와봐서…”
어쩔까, 오늘 그냥 하교를 할까? 하지만, 이미 그것은 정해진 일이었다. 월요일에는 도장엘
가야 한다. 만남이란 때때로 안타까움의 실 한가닥을 매어두고 멀어지는 것에 또다른 의미가 있는지 모르니까.
“오늘, 정말 고맙다. 이 다음에 다른 어려운 일, 그래서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항상 연락해라. 예를 들어서, 귀찮은 남학생들이 추근거리면서 따라다니거나 하는 일. 내가 혼내 줄테니까.”
“제가 그렇게 보여요?”
“그럼.”
내게도 저런 여동생이 있었으면. 이 다음에 애인이라도 저렇게 친절하고 예쁜 사람이 생겼으면.
손을 잡아보고 꾸밈없는 단발머리를 쓰다듬어 보고 싶었지만 아직 우리는 그렇게까지 친하지 않으니까.
내가 수민이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어서 거기 쒸워진 아픔들을 슬어낼 수 있다면 좋을텐데.
멀리서 본 모습과 가까이서 본 모습이 다른 아가씨야. 그것은 아직 가까이서 보이는 슬픔과
아픔들이 삶의 한가운데까지 스며들지 않았음이란다. 슬픔도 기쁨도 반은 자신이 만들어 간다고 사람들은 말하지. 나는 더
많은 것을 자신이 만들어 간다고 믿지만.
소나기같은 걱정들이 그치면 비 갠 하늘 아래에서 연못 속의 금붕어가 쓰는 시처럼 그 날의
불안한 예감들이 삶을 꾸미는 무늬로만 남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화사한 햇살이 비쳐들면
한 때 잠깐
내리던 비가 들려주던
시의 제목은
뭐가 될까?
4330.5.18
수민이가 들려준 시(詩)를 읽고,
O O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