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집착이 쌓여서 인연이 되었을까? 아주 작은, 아주 짧은 인연이라도… 말이다. 예감에 휩싸여 매일 편지를 썼던 그 다음 해에 나는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사람에게서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전화가 왔다.

나는 미국인들과의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5월의 첫날, 바람에 날리던 꽃씨들이 눈처럼 허공을 가득 채우던 토요일 오후에 그 사람을 만났다. 대학 2학년 때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도 5월이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찻집에서 마주 앉아서 오래 동안 지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동안 내가 얼마나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했던가 하는 얘기를 했다. 편지를 쓴 얘기들, 그리고 편지들이 모두 반송되어 왔던 얘기들, 그리고 내가 그런 편지를 쓴 예감에 대한 얘기들 말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내가 맨 처음 보낸 편지를 보고 슬퍼서 울었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는 이사를 갔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도 내게 얘기했다.


정말 집착이 쌓여서 작은 인연이 되었을까?

대학 시절 때, 나와 처음 만난 다음 해 쯤에 남자 친구가 생겼었단다. 그 학생은 법대생이었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래 동안 친했었고, 마침내 서로 결혼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남자가 군대를 갔다 온 후 사법고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고, 유명한 법률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 부모님이 갑자기 결혼을 반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남자는 외동아들이었고, 알고 보니 마마보이였는데, 그의 엄마가 갖은 험담과 협박까지 동원해서 자기 아들을 포기하라고 그 사람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 남자를 너무 오래 동안 사랑했었기 때문에 한참을 갈등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게 작년 봄이었다고 한다. 정확한 시기는 말하지 않았다. 그 때쯤 내가 전화를 하고 편지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선 그 사람이 한동안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고뇌에 찬 시간들을 보냈다고 했다. 얘기를 들으며 난 내가 써 보냈던 편지의 한 대목을 생각하게 되었다.

― 그건 세파에 묻혀서 가까우면서도 먼 곳에서 자꾸 어긋나며 애타는 그런 것…

나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왜 그런 글을 써서 보냈지?

― 그 매일의 편지글 속에 나의 집착이 쌓이고 쌓여 어느덧 인연이 되면…

지금도 나는 나의 예감이 맞았던 것이라고 믿고 있다.

― 우연히 길을 가다가 멀리서라도 너를 한번쯤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단다.

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문제가 남아있다. 혹은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거나. 나는 어떻게 이런 예감을 가질 수 있는가? 예감도 어떤 것을 아는 것의 일종이다. 즉 인식의 일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좀더 포괄적으로 문제는 이렇게 된다. 나는 어떻게 이러한 종류의 인식(예감)을 가질 수 있는가? 인식론적 물음에 집중하는 근세 철학은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답한다.

유명한 경험론자인 로크의 생각을 들여다보자. 로크는 경험론자이기 때문에 모든 인식은 경험으로부터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경험적 인식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즉 우리의 의식 바깥에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어떤 빛이나 소리 등의 ‘감각적 표상’을 통해서 우리 의식 안으로 전달된다. 그러면 그 전달된 표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의식은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로크 입장에서 보면 내 예감도 이러한 설명에 맞아 떨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세파에 휩쓸려 고통스러워하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어떤 감각적 표상이 되어서 나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이 표상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사람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예감에서는 이 감각 표상이 없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에는 망막에 맺히는 사물의 영상이, 그리고 어떤 것을 들을 때에는 고막을 두드리는 음파가 그러한 감각 표상이 될 텐데, 나의 예감에서는 어떤 감각 표상이 인식을 매개하는가? 그렇다면 나의 예감이 잘못된 인식일까 아니면 로크의 이론이 잘못된 이론일까?

경험론자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치자. 합리론자의 입장에서는 어떤가? 합리론자들은 지식의 중요한 부분, 즉 참다운 지식은 직관적으로 명석 판명한 것에서 출발하여 논리적으로 도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명석 판명”하다는 말을 초보자들은 ‘분명하고 당연하다’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합리론자인 데카르트는 이러한 지식의 출발점이 되는 명석 판명한 것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인식은 생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 생각은 관념들이 결합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합리론자들의 생각이다. 생각의 부분들인 관념은 세 종류로 나뉘어지는데 외래 관념, 허구 관념, 본유 관념이 그것이다. 이것을 알기 쉽게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관념의 종류 관념의 출처와 속성
외래 관념 감각을 통해서 얻어진 관념, 외부에서 받아들인 관념이다.
허구 관념 상상을 통해서 얻어진 관념. 근거 없는 생각을 가리킨다.
본유 관념

선험적인 것, 사유하는 능력에서 생겨나는 관념.

이 중에서 본유 관념만이 참다운 지식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합리론자들의 생각이다. 한편 좀더 강한 합리론자인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가진 모든 표상들은 본유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감각도 사실은 우리가 바깥으로부터 저절로 표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생각(특히 이성(理性))이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에서는 나의 예감이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이 경우에 나의 마음 속에 있었던 본유 관념이 “집착이 쌓여…”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애착이었다고 해 보자. 그리고 이 본유 관념이 모종의, 아주 흐릿한 감각을 만들고 그것이 예감처럼 느껴졌다고 말이다. 그럴 듯 하다. 하지만 사실 본유 관념이란 사유하는 능력에서 생겨나는 선험적인 것이기 때문에 대학시절에 만난 사람에 대한 나의 애착은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그런 본유 관념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선험적인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각의 능력이어야 한다. 그나마 경험론보다는 더 가능성을 보여주긴 했지만 합리론도 나의 예감을 설명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럼 내 예감이 그렇게 맞아 떨어진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글쎄, 그건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생각을 통해서 여러분은 합리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의 생각은 좀더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