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제시한 그 ‘절대적인 것’, 그래서 입장이 아무리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이데아(idea)이다. 그럼 이데아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원형(原形) 같은 것이다. ‘원형’이라고 해서, 동그라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의 이상적인 모습’ 말이다. 예를 들어서 완전한 동그라미, 네모, 세모, 혹은 이상적인 집, 미인의 이상형 등등. 플라톤은 이러한 이데아들이 절대적인 것이고, 그리하여 진정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살짝, ‘절대적인 것’에서 ‘진정 존재하는 것’으로 관심이 바뀐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 이전이나 플라톤 이후에 있어서 철학적 관심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있었지만 ‘절대적인 것’, 혹은 ‘객관적인 것’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고 그 대신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을 썼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 하면, 여기서 ‘존재한다’라는 말은 그것 자체로서 있다는 말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다른 입장에서 쳐다보든 상관없이 그대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절대적으로 있다’라는 말이다.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인 것이고, 상대적인 것들의 기준이 되어 줄 수 있다.


다시 플라톤의 이데아로 돌아와서, 일단 이상적인 동그라미, 네모, 세모 등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왜 플라톤이 이러한 것들을 진정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기하학을 생각하는 것이다.

기하학이 무엇인지는 대충 알 것이다. 직선, 삼각형, 사각형, 원 등을 이용해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원주각의 크기는 중심각의 크기의 반이다’와 같은 것들을 증명하는 것 말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중학교 3학년 수학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배운다.(물론 그 전에도 조금씩 배운다.) 플라톤 시대 때에 이 기하학(유틀리드 기하학)이 거의 완전히 정리되었는데, 플라톤은 이 기하학을 학문의 가장 모범적인 형태로 삼았다.

왜 동그라미, 네모, 세모 등이 진정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는가? 수레의 바퀴를 생각해 보면, 수레의 바퀴는 그것이 둥글기 때문에 굴러가는 것일까 아니면 쇠와 고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굴러가는 것일까? 쇠와 고무 아니라 무엇으로 만들든 수레바퀴가 네모나 세모의 형태로 만들어졌다면 잘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둥글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굴러간다. 잘 굴러가는 모든 것들이 동그라미의 형태로 생겼다는 것을 봄으로써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수레바퀴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잘 굴러간다면, 동그라미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그라미만이 그런가? 건축가는 집이 어떻게 중량을 견디고 튼튼하게 서 있는가 하는 것을 기하학적 구조와 계산으로 설계한다. 거기에 세모와 네모, 그리고 기타의 기하학적으로 증명된 지식들이 활용된다. 무엇으로 만들든 이등변 삼각형의 구조를 만들면 양 변에 똑같은 힘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 속에서 그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기하학적 구조들, 즉 동그라미, 세모, 네모, 직선 등이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수레바퀴가 비뚤게 둥글 때보다 완벽하게 둥글 때 더 잘 굴러가고, 또 우리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수레바퀴를 더욱 둥글게 만들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수레바퀴보다 완벽한 동그라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동그라미라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수레바퀴를 만들 때 그것을 흉내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간단한 서양 철학사 <3>: 플라톤

기하학적인 것들, 동그라미, 세모, 네모 등은 그렇다 치자. 그러면 플라톤은 왜 집, 미인 등의 이데아까지 생각했을까? 그래서 모든 사물의 이데아를 생각했을까? 방금 본 수레바퀴에 대한 생각과 같은 사고방식을 모든 것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자들을 보면서 어떤 여자가 더 미인이고 어떤 여자가 덜 미인인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가장 완벽한 미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완벽한 미인에 가까울수록 더 미인이라고 할 수 있고 멀수록 덜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집의 이데아도 마찬가지이다. 오피스텔과 시골 기와집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이상적인 집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예쁜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결코 아파트나 오피스텔을 그리지는 않으니까, 오피스텔보다는 시골 기와집이 더 이상적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이상적인 집’이란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데아이다.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면 왜 이것이 더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게 할 수 있다.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는 것과 변함없이 같은 상태로 있는 것, 둘 중의 어느 것이 더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두 번째 것, 즉 변함없이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더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레 바퀴와 건물들이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동그라미와 기하학의 법칙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역시 기하학의 법칙들이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데아가 더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이제 플라톤이, 현실 사물은 이데아의 그림자와 같다고 주장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설명은, 이데아와 현실 사물들이 서로 어떻게 함께 존재하는지 그 방식을 묻는 데에 대한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