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한번씩 읽어 보시기를...
재미있는 글이기도 하구요.
http://blog.empas.com/eyesim/14766914
오랫만에 공감되는 글 하나 퍼왔다.
김용석이라는 영산대 교수의 글이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대중적인 책을 여러권 낸 바 있는 학자이다.
학술적인, 너무도 학술적인......
- 김용석"정치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계적인 고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용가리]가 아니겠습니까?"
"??????????"
"리바이어던(Leviathan)이 아니겠습니까?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우리말로 하면 '용가리' 쯤 되지 않겠습니까?"
"!!!!!!!!!!!!!!!!"
얼마 전 초청 강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상은 현직 교수, 연구원, 대학원생들이었다. 내게는 당연해 보이는 이 질문과 대답에 모두 묵묵부답이었다가는 의아해 하다가 마침내는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하긴 우리나라에서 학자, 교수, 지식인, 지성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쓰는 책의 제목에 잔뜩 오염되어 있는 머리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는지 모른다.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정치사상을 내용으로 하고 있더라도 '용가리'라고 이름 붙이면 학술서가 될 수 없다. 용가리가 리바이어던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말은 아니라고 누가 반론을 한다고 하자, 그러면 '거대한 괴물', 아니면 해수(海獸) 정도로 이름 붙이면 학술서라고 인정할까? 소설 제목이라면 몰라도, 학술서나 전문서 제목으로는 용납이 안 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제목을 붙여야 학술적으로 '인정'을 받는가(우리나라에서 인정이나 공인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그거야 뻔하다. 우선 '...론(論)'이나 '....학(學)' 자가 들어가야 한다. 철학개론, 경제학원론, 법학통론, 경제학총론 등을 비롯해서, 현대문화론, 대중문화론, 21세기 정치학, 언어철학, 기호학, 담론의 지형학 등등. 아니면 최소한 '....연구'라는 말이 붙어야 한다. 가족사회연구, 분배원리에 관한 연구, 일본문화 연구 등등. 내용이야 어쨌든 우선 이런 말꼬리들이 붙어 있어야 학술적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리 어렵지 않게 학술서 목록에 등재될 수 있다. 참으로 '학술적인, 너무도 학술적인' 제목들이다.
상당수의 대학 교수들은 이렇게 '학술적인 너무도 학술적인' 강박 관념에 싸여 연구업적을 쌓아간다. 그러다 보니 창의성 있는 연구는 고사하고 그저 마지못해 하는 것도 제대로 연구를 하는 게 아니라, 연구업적을 관리하는 것이다(물론 그것은 양적으로 계산한 일정 수준의 학술 연구업적이 있어야 한다는 제도적 압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양산해내는 연구 성과가 있더라도 그것은 '학문적 쓰레기'가 되기 쉬운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도 이 시대의 심각한 공해 중 하나다. 그것은 정신적 공해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 공해이기도 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읽히지도 않을 논문과 학술저서는 종이만 낭비할 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술지 논문 등은 '별쇄본'이라는 것을 만들기 때문에 각 논문의 필자가 학술지와 별쇄본이라는 이중적 소비를 한다(연구업적 심사에는 별쇄본을 제출해야 그럴 듯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어떤 교수는 자기 연구실에 오는 사람들에게 별쇄본을 나눠주는 것을 자기 과시 쯤으로 여긴다. 그래서 '별쇄본 문화'라는 게 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이런 학술적 성과가 시대를 선도하는 것은 차치하고, 전통적 의미의 학술성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에게 전해오는 세계적인 학술업적들은 무늬만 학술적이고자 하는 데에 전혀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홉스의 '용가리'에 이어 세계적 고전들의 예를 조금 더 들어보자. 우리의 철학서는 언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멋진 제목을 붙일 것인가. 우리 학계는 니체의 이 책을 대단한 고전으로 떠받들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백두산 신령은 이렇게 말했다"는 제목으로 책을 낸다면, 그 내용이 아무리 학술적이고 뛰어난 정신을 담고 있어도 선뜻 학술서의 목록에 넣겠는가. 니체의 다른 책인 '유쾌한 지식' 정도의 제목도 한국 학자가 쓴다면 통하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은 또 어떤가.
우리 학계에 자리 잡고 있는 학자들은 제목의 문학성 또는 예술성에 대해서는 전혀 무심하다. 오히려 젊은 학자나 재야 학자들이 학회나 공적인 학술재단을 거치지 않고 출판사를 통해 매우 학술적인 내용이 담긴 저서에 예술적 이름을 붙여 출간하면, 그 학술성을 의심한다. 그러고는 자신들은 '학'이나 '론' 또는 '연구' 같은 말꼬리를 붙여서 거의 자비 출판한다(일반 독자층은 물론이고 학술적으로도 전혀 읽히지 않을 책을 출판해 줄 정신 나간 출판사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좀 더 들어보자. '인간실존론'은 학술상의 대상이 되어도, '이거냐, 저거냐' 라는 책은 예심에서 제외될지 모른다. 하지만 후자는 실존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제목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같은 제목은 자신의 저서를 위해 따로 만든 말이다. '없는 장소'라는 뜻인데, 이 정도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도 우리 학계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이것은 우리 학자들이 시대를 관통해서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는 '통시적(通時的) 가치'가 있는 저술을 하지 못하는 것과 연관 있다. 무늬만 학술적인 업적은 통시적 가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학술 장려의 올바른 방식은 학자의 창의성을 각질화한 무늬에 가두지 않는 것이다.
교육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룻소의 저서는 '에밀'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철학자는 '철수'라는 제목으로 학술서를 낼 엄두를 못 낸다. 이것은 약과다. 세계적 고전 제목이 사람 이름인 경우는 흔하다. '크리톤', '파이돈', '파이드로스', '뤼시스', '라케스',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 '티마이오스'.... 이것은 서양 학문의 최고봉이라는 플라톤 저작의 제목들이다. 이에 상응하는 우리말은 '갑돌이', '을돌이', '영식이', '남철이' 쯤 된다(하긴 당시 그리스 폴리스도 남성 중심 사회라서 여성의 이름은 없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심도 있고 학문적 가치가 높은 대화편에 '민식', '동건', '상우' 등의 이름을 붙이면 난리 날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아예 철학대화편에 여성을 등장시킨 '혜수', '효리' 등의 이름을 붙이면 자극을 좀 받을까. 아니, 그 내용이 아무리 고상하고 깊이 있어도 통속적이라고 엄청 비난의 화살부터 쏟아 붓고 묵살하려 들 것이다.
예를 들자면 동양 고전을 포함하여 한참 남았지만, 지면 상 끝으로 19세기의 중요한 사상논쟁을 담은 저서를 하나 소개한다. 철학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책의 가치를 알 것이다. 그것은 브루노 바우어의 [무신론자이자 그리스도의 적인 헤겔에 대한 최후심판의 나팔소리(Die Posaune des j ngsten Gerichts ber Hegel den Atheisten und Antichristen)]이다. 학술적이기 위해서 구색 맞추기에 전전긍긍하는 오늘 우리의 지식인들에게 이런 책은 어떨까? [비학술적이고 비예술적인 먹물들에 대한 심판의 나팔소리].
우리나라에서 쓸데없이 폼잡고 있는 지식인들을 왜 '먹물'이라고 하는 줄 아는가. 그들은 천연색의 상상력과 창의성에 있어서는 F학점이기 때문이다. 요즘 교수들과 제도권 학자들은 학생들에게 창의성을 무척 강조한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창의력을 발휘하는지는 자성하지 않는다. 과거 현인들의 훌륭한 가르침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고 미래를 향해 한 발짝 떼어놓기에도 역부족인 것이다. 제대로 학술적이어야만 올바르게 교육적일 수 있다. 오늘날 우리 학계와 대학문화에서 교육과 학술이 따로 노는 이유를 깨달아야 할 때다.
먹물들이여, 이제 그만 어둠침침하게 폼잡지 말고 천연색 작업도 좀 해야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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