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의 귀에 익은 현대 철학자들의 이름은 많겠지만, 나는 그런 현대 철학자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많이 설명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도 철학을 처음 공부할 때 옛날 옛적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같은 사람의 철학보다는 현대 철학에 더 관심이 있었다. 아마도 여러분도 그럴지 모른다. 얼마 전에 유행했던 포스트모더니즘, 비트겐슈타인, 훗설, 혹은 크립케 같은 요즘 사람들 말이다. 나는 옛날의 철학은 대충만 알면 되고 오늘날의 발전된 철학을 더 정확히 알아서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대철학자들에 대한 설명은 간단히 끝내는 것이다. 왜 그런가?

철학이란 학문의 핵심적인 특징은 질문과 답의 관계에 대한 생각, 그래서 생각에 대한 생각을 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당연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가장 보편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보편적인 것이란, 바로 그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시대가 지나도 잘 변하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이 책에서도 조금은 살펴보았듯이, 철학자들이 말하는 내용, 그리고 그들의 통찰력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조금씩 정교해지고 다른 식으로 포장되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더 많은 공부를 한다면 다른 철학 책에서도 이것을 계속 보게 될 것이다.

 

‘가을에 실려 온 동화’와 헤어진 주된 이유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자 철학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과 만나서 즐겁게 웃으며 얘기하다가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에요. 우리가 마지막 만나는 날!” 그 후에 만난 ‘비와 함께 내리는 시’는 내가 공부하기보다는 자기랑 같이 있어주기를 바랬다. 그리고는 나랑 잘 친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랑 헤어지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에 실려 온 동화’에게 준 마지막 선물의 이름 속에 “슬픈 안나”란 말이 있다는 것이 내겐 가끔 우연 이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실체’라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데카르트로 이어져서 칸트를 거친 후 헤겔로 나아간다. 헤겔에서의 실체는 무형의 정신, 신적인 정신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그 기본적인 생각에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다른 모든 철학자들과 같이 공유하는 바가 있는데, 그것은 변화의 뒤에 놓여진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사상적 배경 속에서 어떤 변화무쌍한 것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 변화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곤 한다.


이데아, 혹은 형상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최근의 현대 철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언어철학의 핵심 주제는 언어의 ‘의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학자들은 크게 두 파로 갈라졌다. 하나는 그 말이 가리키는 사물이 그 말의 의미라는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말이 표시하는 추상적인 성질이 그 말의 의미라는 입장이었다. 그 중 두 번째 입장에서 나타나는 ‘추상적인 성질’은 곧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직접 ‘플라톤주의자’들이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보면 시대는 변해도 철학자들의 사상은 거기에서 거기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때가 많이 있다. 특히 철학을 전공해서, 다양한 철학자들의 다양한 포장을 걷어내고 그 속에 포함된 핵심적인 생각을 볼 수 있을 때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언제나 각 시대에는 많은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지나고 나서 가치있는 것으로 살아남은 철학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앞에서 얘기한 하버마스도 몇 년 전에는 대중적으로 굉장히 유명했지만 그새 인기가 좀 사그라들었다. 오늘날의 현대 철학의 내용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위험이 그런 것이다. 여러분이 이렇게 어려운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허비하는 많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다음 시대가 되면 이 철학은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고 잊혀져 버리는 것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실제로 어떤 철학 교수님들은 자주 이런 위험들을 지적하셨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들은 내가 현대철학을 자세히 소개하지 않는 까닭을 조금은 이해하였을 것이다. 보석이 가치있는 것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주고자 한다.

철학의 보편성과 현대 철학
 

‘집착이 쌓여…’와 사귀지 못했던 이유는 그 때 내가 다른 여학생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여름 단풍’과도 사귀지 못했다면 그건 그 사람이 약혼자가 있다고 내게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약혼자가 없었다. 나도 대학 2학년 때 여자 친구가 없었다. 처음 만난 '여름 단풍'의 얼굴에서 ‘집착이 쌓여…’의 어릴 적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 내게만 우연 이상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름 단풍’과 결혼을 약속하고 나서도 그 사람이 처음에 나와 거리를 두려 했던 기억 때문에 섭섭한 생각이 남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집착이 쌓여…’를 대했던 나의 태도를 생각하면서 위로하곤 했다.

 

현대 철학이란 비유하자면 우리 집 앞산의 복잡하게 얽힌 산길과 같다. 그것을 아는 것도 의미있고 당장 유용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국의 길을 알고자 한다면 앞산의 산길을 안다는 것의 의미는 훨씬 작아진다. 철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생각 속 세계의 전체 길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 세계에서도 자기가 서 있는 발 앞의 작은 길들을 세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몰입하면 전체 길을 이해할 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더군다나, 발 앞의 작은 길은 전체 길의 흐름을 알 때 쉽게 방향을 잡아 나갈 수 있다. 큰 산맥의 줄기를 이해하고 있다면 발 앞에 펼쳐진 작은 산이나 얼마나 클 수 있는지 혹은 발 앞의 길이 어디에서 끝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태백산맥에서 광주산맥과 차령산맥, 그리고 소백산맥이 뻗어나왔고 차령산맥은 광주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있다. 그렇다면 차령산맥의 어떤 산 속에 있는 당신의 발 앞에 어떤 길이 있더라도 그 길이 남북으로 뻗는다면 산맥들 사이의 평지로 이어질 것이고, 그 길이 길게 동쪽으로 뻗는다면 그 길은 더 깊은 태백산맥으로 이어질 것임을 알 수 있다.

돌아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일찍 결혼하고 싶었고, 또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나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이제 끝나가고 있다. 내가 “사랑초의 상념”을 선물하기 전, “청혼가”라는 시를 써서 선물했을 때 산사의 여름 단풍은 답가를 써서 승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결혼이 큰 산맥의 흐름을 살피는 철학적 통찰에 의존한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나는 어떤 면에서 철학적 통찰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것에 의존했다. 예감과 기다림, 그리고 옛 사랑에 대한 기억 등. 철학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여러 방식을 고려해도 나의 선택은 집 앞의 길이라도 잘 살피는 사람들의 합리적인 통찰보다 불합리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하면 나는 어떤 한 사람 이상의 실체, 즉 운명을 찾아 헤매려하지 않았는가. 보다 더 지속적이고, 그래서 보다 더 불변적인 것을 찾고자 했으니까. 물론 그 운명이란 것도 정말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불합리한 점이 많지만…

내 생각은 이렇게 혼란되어 있는데, 여러분은 여기에서 철학에 대해 설명한 나의 말들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여러분의 새로운 철학 여행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까? 의심해 보라.

 

이 사람을 내가 대했던 방식과 똑같이 저 사람이 나를 대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내게 되돌아 오는 것이다. ‘가을에 실려 온 동화’와 ‘비와 함께 내리는 시’ 사이에 있는 이 묘한 되갚음 관계가 그들보다 이전에 만난 ‘집착이 쌓여…’와 그들보다 이후에 만난 ‘여름 단풍’ 두 사람 사이에서도 반복되었던 것 같다. 조금 다른 식으로 포장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그 바탕이 될 실체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