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상대주의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는 상대주의와 관련된 몇 가지 사항들을 설명하겠다.
첫째, 적어도 서양 철학의 흐름은 상대주의와의 싸움의 역사이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성사의 흐름은 근본적으로 상대주의와의 싸움의 역사이다. 이것을 아는 것은 사상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고, 또 그래서 자신이 관심 있는 철학내용을 쉽고 빠르게 윤곽을 잡아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비유를 하자면 객관주의가 대륙이고 상대주의는 바다라고 할 수 있다. 어디에 바다가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땅덩어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안다는 것과 대략적으로는 같다. 대체로 바다가 있는 쪽으로 땅은 점점 낮아지기 마련이고 산이 있는 곳은 바다와 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낮지도 않은 땅에 거주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철학들은 지나친 객관주의라는 산꼭대기와 상대주의라는 바다 사이의 땅에 거주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산의 정상에도 올라가 보고 때로는 바다에 나갔다가 표류하기도 하듯이 어떤 철학자들은 지나친 객관주의로 나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주의의 바다에로 나아가 표류하기도 한다.
둘째, 희랍 시대의 상대주의자 소피스트들에 대해 아는 것도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왜 소피스트들은 상대주의를 취했는가?
소피스트들은 돈을 받고 정치적인 웅변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그리이스는 민주주의 체제의 제국주의 시대였다. 그래서 해외로 뻗어나가고 있었으며 야심찬 정치적 지도자들이 필요한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말을 잘 해야만 했다. 그 말을 잘하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소피스트였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말을 잘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는 유리하게 말하고 남에게는 불리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특히 상황이 바뀌면 어제는 나쁘던 것이 오늘은 좋은 것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인 상황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치상황을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어느 나라 정치나 마찬가지이고 또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정치인들을 위한 말하는 법, 즉 변론을 가르치는 소피스트들이 환영을 받을 수 있으려면 정치인들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을 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피스트들의 변론은 항상 모든 것에 관해서 말할 수 있어야만 하며 상대를 설복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이런 소피스트들이 상대주의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말한 프로타고라스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것은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각각의 개인을 말한다. 각각의 사람들이 모두 기준이 된다는 것은 기준이 모두 다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모든 것이 개인의 입장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 말은 상대주의의 전형적인 표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상대주의는 대체로 회의주의로 흐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이 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달라진다면 당연히 어느 사람의 입장을 떠난 ‘객관적인’ 진리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회의주의가 상대주의에 따라 나오는 까닭이다. 회의주의란, 쉽게 말해서 진리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는 입장이다.
당시에 있어서 회의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를 말하라면 “고르기아스”라는 소피스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소피스트였던 고르기아스는 이렇게 말했다. 즉, “아무 것도 있지 않다. 그리고 만약에 무엇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비록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남에게 말해줄 수도 없다.” 이것은 회의주의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었다.
자, 그럼 고르기아스의 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르기아스의 말을 다시 한번 보면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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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아무 것도 있지 않다. ② 그리고 만약에 무엇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③ 그리고 비록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남에게 말해줄 수도 없다.” |
대략 설명하면 이렇다. 모든 것이 각자 입장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 있으니까 아무 것도 있지 않게 된다. 바꿔 말하면 무언가가 ‘객관적으로’(이 말을 슬쩍 넣어보자.) 있다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해가 될 것이다. 귀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어떤 사람은 귀신을 봤다고 그러고 다른 사람들은 귀신을 못 봤다고 그러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니까 말이다. 이 경우에 결국 객관적인 귀신이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야기 “아무 것도 없다”라는 말의 뜻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얼핏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즉, “여러 사람들에게 다르게 보인다고 꼭 그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서 예술과 외설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는 입장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겠지만 그 객관적인 기준은, 비록 우리가 알 수 없더라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이다. 좋은 지적이다. 이것이 또한 바로 고르기아스가 두 번째 얘기를 한 이유이다. 즉 “있다고 하더라도 인식할 수 없다”라는 말 말이다. 여기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객관적인 내용을 인식할 수 없다고 이해해야 한다.
세 번째 얘기도 비슷한데, 그건 사람들마다 입장이 다 다르니, 누군가가 제대로 인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전달하려고 하면 그 전달되는 내용에 대해서도 사람들마다 입장이 다 다를 것이므로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럴 듯 하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만약 고르기아스의 말이 맞다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르기아스가 한 말을 우리가 알아듣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한 것은 고르기아스가 한 말의 뜻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어떻게 말해도 그렇게 될 것이 틀림없다, 고르기아스의 말이 맞다면 말이다. 그럼, 왜 고르기아스는 처음부터 알아듣지도
못할 그런 말을 하고 있는가?
그랬기 때문에 고르기아스의 말에 대해서 플라톤이 말했다. “이 말은 손톱만큼이라도 맞는 말일 수 있는가?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고르기아스는
왜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말을 하는 플라톤의 입장이라는 것은 고르기아스와 반대 입장에 서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그러니까
비판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서로 의사전달이 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다시, 무엇인가 객관적인 것에 의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객관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거투르드 스타인의 “해답”에서> |
최소한 하나의 해답은 있는 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