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주의의 반대편에는 어떤 입장이 있는가? 그것은 객관주의이다. 객관주의는 많은 것이 상대적으로 다르게 보이더라도 “절대적인 것, 그래서 입장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최소한 하나는 있다”라는 입장이다. “사랑해”의 반대말은 “미워해”가 아니라 “누구시죠?”이듯이, 상대주의의 반대인 객관주의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이 입장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것, ―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겠지만, 그건 설득력이 별로 없다. 객관주의를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그렇게 무모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상대주의가 매우 그럴듯하게 보이듯이 그 반대편에서 쌍벽을 이루는 객관주의 역시 꽤나 설득력이 있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많은 것이 보기에 따라서 달라 보이지만 그래도 불변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있다 ― 라고 객관주의는 주장한다. 이것도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버린다고 해서, 즉 객관주의의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문제가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객관주의에서는 “그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대답하는 방식은 지금까지 크게는 두 가지가 제시되었다. 그 하나는 플라톤의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다.


여러분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을 이미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는 별로 관심이 많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만나본 많은 비철학도들, 하지만 철학에 관심이 생겼다는 사람들이 흥미를 쉽게 느끼는 철학자들은 보다 현대의 사람들이다. 자끄 라캉, 데리다, 푸코 등등이다. 데카르트 정도만 되도 이미 구닥다리라는 느낌이 들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서양 철학사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중을 비유하자면 한반도에서의 낭림산백, 태백산맥과 같다.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에서 다른 산맥들이 갈라져 나오고, 또 그것들이 낮고 작은 산맥이 되듯이 그 후의 모든 서양철학자들의 사상이란 대체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데카르트 정도 되면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 정도 될지 모른다. 한편 요즘에 이름을 날리는 몇몇 유명한 학자들은 대부분 북한산 정도나 될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현대 철학자라면 우리가 그 숲 속에 있으므로 그 산의 크기를 잘 알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이건 비유라고 치자. 좀더 직설적으로 간단히 설명하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은 지금까지의 서양철학에서 논의했던 모든 문제들을 제기했다. 철학에서는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하는 것보다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서양철학 전체가 플라톤이 생각했던 문제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좀 다른 방식으로, 그래서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대체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이야기들을 언급했다. 따라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모르고 서양철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체로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맴돌면서 세상 끝까지 갔다고 믿는 손오공과 같은 실수를 범하는 꼴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요성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철학은 감정의 흐름일까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탐구일까? 철학이 학문에 포함되는 한, 그것은 탐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리 독백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대화가 있다. 생각 속에 있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 이것이 철학 속에 있는 첫 번째 대화이다.

철학 속에 있는 두 번째 대화는 첫 번째 대화(즉 생각)와 세상과의 대화이다. 좀 말이 현란해서 어렵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내용이 현실과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말이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되기 위해서 생각은 내적으로 논리에 맞고 근거를 가져야 한다. 만약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생각, 그래서 논리적이지 않은 생각이 되면 그 질문과 대답은 서로 어긋나서 동문서답이 된다. 결국 자신과의 대화가 되지 않는다. 한편 그 대화가 다시 세상과 대화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문제해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세상과 일치하는 생각 속에서, 즉 현실적인 생각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답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위에서 본 내 생각, 즉 나 자신과의 대화의 결론대로 행동했고, 그래서 2학년 초에 어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 이성으로서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현명하게 행동했다. 즉 상대가 내게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자연스럽게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람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내게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던 사람이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였고 그 때 내가 그 사람에게 들려 준 얘기가 그 때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어떤 여학생이었다. 내겐 별 의미 없는 그런 사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여러분이 여대생이라면 말이다. 나는 내가 마음에 들어 한 그 사람과 친하지 못했고 조금씩 멀어져갔다.

이 경우에 내가 나 자신과 나누었던 대화는 세상과의 대화에서 실패했다. 그래서 문제해결에 실패했던 것이다. 세상과 나의 생각은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결국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할 기회도 잃고 말았다. 그리고는 10년이 지나서야 그 사람을 잠깐 만날 수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