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여자 친구 있어요?”

5월의 봄 햇살이 창 밖에서 화사하게 번질 때 한 커피숍에서 처음으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그 사람이 물었다. 약간 귀엽게 까칠까칠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로 말이다. 대학 2학년생이었던 난 그 때 그 사람이 너무 귀엽게 보여서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답했다.

“그럼, 있지.”

내가 그렇게 대답한 데에는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때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 사람이 흥미 거리가 생겼다는 듯 여전히 귀엽게 웃으며 물었기 때문에 내가 옳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언니예요? 얘기해 주세요.”

나는 그 사람이 나를 부담 없이 대하는 것이 좋아서 어떤 사람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내 가슴을 찌르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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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대화이다.

그리고 철학에는 두 겹의 대화가 있다. 한 겹의 대화는 질문자와 대답자의 대화이고, 다른 한 겹은 생각과 세상의 대화이다.

먼저 철학 속에 있는 첫 번째 대화가 무엇인지 설명하겠다. 그 대화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이해하기 쉽다. 즉 생각이 곧 자기 자신과의 대화라고 말이다. 기억해 보자. 앞에서 나는 철학이란 생각에 대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생각은 곧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철학은 질문과 답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라고도 했었다.

우리가 생각을 할 때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 보자.

대학 1학년 때 내 목표 중의 하나는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마음에 드는 여학생들에게 말을 걸었었다. 두 번이나 그랬고, 인사하고 말을 트기는 했다. 그런데, 사귀는 데는 실패했다. 두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내가 파란 옷만 입고 다니는 아이라서 이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 용기는 냈지만 말을 건넬 수 있게 된 후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말을 걸고, 인사를 나누고 친구처럼 지내기로 한다. 그 후에 내 감정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고, 상대가 나에게 호감을 보일 경우에 선물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 때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리고는 상대에게 어떤 선물을 해 보기도 전에 거절을 당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왜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들로부터 번번이 거절당했을까? 내가 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적절하지 않았나? 어떤 점에서 적절하지 않았을까? 혹시 내가 그들을 이성(異性)관계라는 점에서 너무 부담을 느끼게 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앞으로는 가능한 한 상대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없는 듯이 행동해 봐야겠다.”

대학교 1학년 말쯤에 나는 이런 식의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것은 곧 다음과 같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다.

(나) 나는 왜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들로부터 번번이 거절당했을까? (또 다른 나) 어쩌면 내가 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나) 어떤 점에서 적절하지 않았을까? (또 다른 나) 한 가지 대답은, 내가 그들을 이성(異性)관계라는 점에서 너무 부담을 느끼게 대했다는 거야. (나)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 경우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되겠네? (또 다른 나) 그래. 오히려 앞으로는 가능한 한 상대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이렇게 자기 자신과의 대화로 바꿀 수 없는 생각도 있을까? 있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 나는 왜 항상 거절만 당할까? 그 사람도 내가 싫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내가 부담스럽다고 말했어. 결국에는 내가 싫다는 말일 거야. 왜 싫을까? 정말 슬픈 현실이야 내 마음에 드는 여자들은 모두 날 싫어하는 것 같애… 난 정말 사랑이란 걸 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이렇게 대화로 바꿀 수 없는 생각과 대화로 바꿀 수 있는 생각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대화로 바꿀 수 없는 생각이란 놀라움, 걱정, 슬픔 등과 같은 감정의 흐름이거나 푸념인데 반해, 대화로 바꿀 수 있는 생각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탐구이다. 감정의 흐름이나 푸념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내용인데 반해 문제 해결을 위한 탐구는 문제해결 결과에 관련해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다. 즉 전자는 주관적인데 반해 후자는 객관적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철학은 감정의 흐름일까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탐구일까? 철학이 학문에 포함되는 한, 그것은 탐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리 독백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대화가 있다. 생각 속에 있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 이것이 철학 속에 있는 첫 번째 대화이다.

철학 속에 있는 두 번째 대화는 첫 번째 대화(즉 생각)와 세상과의 대화이다. 좀 말이 현란해서 어렵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내용이 현실과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말이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되기 위해서 생각은 내적으로 논리에 맞고 근거를 가져야 한다. 만약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생각, 그래서 논리적이지 않은 생각이 되면 그 질문과 대답은 서로 어긋나서 동문서답이 된다. 결국 자신과의 대화가 되지 않는다. 한편 그 대화가 다시 세상과 대화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문제해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세상과 일치하는 생각 속에서, 즉 현실적인 생각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답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위에서 본 내 생각, 즉 나 자신과의 대화의 결론대로 행동했고, 그래서 2학년 초에 어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 이성으로서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현명하게 행동했다. 즉 상대가 내게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자연스럽게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람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내게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던 사람이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였고 그 때 내가 그 사람에게 들려 준 얘기가 그 때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어떤 여학생이었다. 내겐 별 의미 없는 그런 사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여러분이 여대생이라면 말이다. 나는 내가 마음에 들어 한 그 사람과 친하지 못했고 조금씩 멀어져갔다.

이 경우에 내가 나 자신과 나누었던 대화는 세상과의 대화에서 실패했다. 그래서 문제해결에 실패했던 것이다. 세상과 나의 생각은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결국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할 기회도 잃고 말았다. 그리고는 10년이 지나서야 그 사람을 잠깐 만날 수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