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깨비가 고딩들에게

내가 고교 시절에 꿈꾸었던 것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꿈꾸었던 것들, 그리고 고교 시절 동안 항상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것을 말한다면, 그건 좋은 대학엘 진학하는 것이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너무 실망할 만한 것인가?
어쨌든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내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시시콜콜히 말해 보겠다.

이 글이 여러가지 꿈과 희망, 그리고 부담에 시달리는 몇몇 고교생들에게나마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데 참고자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곳은 바닷가의 작은 도시였다. 말이 도시지, "시골"이라 불러도 크게 상관없을 만한 곳이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의 어린 시절은 시골에서 아름답게 추억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미안하지만 서울에 있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이다. ...

그런 시골에서 "일류대"에 가는 것은, 옛날로 치면 "과거급제"에 비할만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니 우리 또래들은 "누가누가 서울대엘 합격했어"라고 주위 사람들이 감탄으로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서울대엘 가면, 아니, 다른 대학이라도 이른바 일류대엘 가면, 그것은 우리 부모님께는 더할 수 없는 효도였다.

요즘같이 서울대나 일류대 병의 사회적 부작용이 크게 지적되는 분위기에서는 이와 같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매우 천박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지방의 작은 도시라는 배경을 이해하면 이것을 조금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거기에는 과외도 없고 입시학원도 없다. 눈에 보이는 대학생들도 거의 없다. "서울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이 오히려 그 사람을 화려하게 장식할 정도로 순박한 지방이었다. 거기에서 "일류대엘 가야 한다"라는 목적은 서울에서와 같이 엄청난 과외비, 학원비, 학생이 질식할 정도로 경쟁만을 부추기는 대도시의 분위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골에서는 오직 하나만을 의미한다. "학생 자신이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만 한다"라는 것. 그 곳의 어떤 부모님도 자녀를 서울대에 보내기 위해서 과외비를 쓰고, 학생이 공부하도록 집안에서 조용히하고, 그러면서 실패하면 부담을 주고... 이렇게 할 수 없었다. 모두들 생활에 바빠서 마음 속의 기원 이상의 것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그리고 학급에서, 친구들이 서로 경쟁한다는 것, 그래서 경쟁심을 갖는다는 것, ... 이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서는 학생들이 그렇게 경쟁하고, 그래서 우정이 깨어지고 살벌한 분위기가 생긴다는 말을 아주 가끔 들으면,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가 상상해 낸 것이겠지...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전교 1등하는 학생에게 전교 2등하는 학생이 모르는 것을 묻고 설명을 들으면 주위의 친구들(주로 노는 친구들)은 이렇게 자기들끼리 농담을 던졌다.

"야, 임마, 너도 저렇게 공부 좀 해 봐라. 니가 그러니까 공부를 못하지!"
"야, 그러지 말고 너도 모르는 것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나도 초등학생 때는 꽤나 날렸어!"

그만큼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이런 경우에 1등짜리가 경쟁심에서 가르쳐주지 않거나 회피하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경우에 요즘말로 그 학생이 왕따를 당했을 정도. 그리고 싸움을 잘하는 친구들은, 가능하면 공부만 열심히하는 학생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 때 놀거나 싸움을 잘 하다가도 마음잡고 공부를 열심히하겠다고 그러면 주위의 운동하는 선배들이 보호해 줄 정도였다. 그 사람이 누구든 간에.

그런 우리 고등학교는 한 학년 전교 600명 중에서 매년 평균 30명 정도가 서울대엘 진학했다.

서울이나 수도권의 현실을 아는 지금 돌이켜 보면, 그건 이상적인 고등학교였다. 과외도 없고 학원도 없고, 단지 있다면 강제적인 자율학습만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에서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 학생들은 없었다. 어차피 모든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자율학습 시간에 공부했으며 놀 거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할 당시 우리 학교에서 전교 석차 6등이었다. 전체 10개반이었으니까 반편성에 따라서 나는 자동적으로 반 1등이었다. 그리고 임시반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건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꿈꾸었던 것은, 정말 아무 다른 것 고려하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내신 성적도 고려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

당시에는 내신 성적이 대학 입학 성적에 반영되었기 때문에 평소 성적 관리도 중요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선생님들로부터 옛날의 이야기들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내신성적이 없었던 시대, 대신에 본고사가 있었던 시대, 그래서 매일 학급 꼴찌를 하다가도 대입시험에서는 당당히 서울대엘, 그것도 경쟁이 치열한 과엘 합격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무협지 같은 시대. 그래서 아무도 평소 성적으로 상대를 가늠할 수 없었고, 그래서 거꾸로 성적으로 친구를 평가하지 않았던 시대의 이야기들. 본고사 수학 시험 문제가 4문제가 나오면 그 중 2문제를 풀 수 있을 경우에 집에 가서 마음 편히 다리를 쭉 뻗고 합격을 자신 하면서 잘 수 있었던 시대.(그만큼 본고사 문제가 어렵다는 이야기.) 나도 그런 시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고교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간신히 갖은 노력을 다해서 반장 선거를 할 때 낙선을 하였고, 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좀 이기적이고 치졸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는 고교 3년 동안 반장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고교 2학년이 되면 내 전교 등수는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고 전교 10등 밖으로 밀려났다. 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뭘 했냐하면, 과외나 학원을 다닌 것...은 당연히 아니고, 각 과목을 잘 하는 친구들에게 "너는 어떻게 영어를 그렇게 잘하냐?"라고 공부 방법을 묻고 나도 그렇게 적용해 보았다. 뿐만 아니라 공부 시간을 늘이기 위해서 잠을 줄여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면 관리하는 방법이 적힌 책을 읽어 보았는데, 거기에는 식사를 줄이면 잠을 적게 잘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일리가 있어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식사를 줄였다. 3끼에서 2끼로,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1년 동안은 하루에 1끼만 먹고 버티었다. 하루에 1끼만 먹을 경우에 4시간 수면이 가장 적절한 것 같았다, 내 경우에는.

등하교 때 공부하는 것은 기본적인 선택이었다. 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외우는 것도 좋았지만, 그 강도가 약했기 때문에 나는 주로 영어 독해문들을(가능하면 길고 어려운 것들) 외우면서 다녔다. 그게 훨씬 편한 것이, 계속적으로 외울 수 있고 만원 버스에서도 공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중요한 한가지는, 끊임없이 공부가 잘 되는 분위기를 찾는다는 것이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와서 공부하는 것은 기본이다. 문제는 밤샘 공부를 할 때 어디서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3학년 여름 약 2개월 정도 동안 이틀에 한번 자면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가장 공부가 잘 되는 장소는 학교 도서관이었다. 아주 조그마하고 독서실 같은, 조금은 허름한 도서관. 그런데 이 도서관은 밤 12시가 되면 문을 잠그기 때문에 나는 나쁜 짓을 해야했다. 집에 가는 척 나와서는 수위 아저씨가 문을 잠근 후에 창문을 열고 들어가서 형광등 하나만을 켜 놓고 그 밑에서 공부를 하는 것. 그런데 나같은 짓을 하는 친구가 또 한명 있었는데 걔도 우리 반 친구였다. 성적이 상위권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 의지가 되어서 한 동안 같이 모기향을 들고 다니면서 도서관에 숨어들며 공부를 하곤 했다.

가끔씩은 아직도 그런 기억이 남아있다. 특히 여름 새벽에 바닷가에서 떠 오르는 태양을 보면, 밤새도록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나와서 해를 바라보며 책가방을 학교 도서관을 나서던 기억이. 조금은 너무 화사하고, 조금은 피로해서 멍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성취감에 젖어서, 이렇게 계속하면 성적을 좀 올릴 수 있겠지.... 하면서 위로하던 기억들.

하지만 이틀에 한 번 자는 공부방식은 상당한 체력을 요구했고 별로 효율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에 그만 두었다.

그 당시 우리들에게 있어서 학급의 친구들끼리 경쟁심을 갖는다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이었다. 비록 그 친구들이 다같이 등수를 겨루는 친구들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비슷한 성적의 학생들이 있는데, 그 한 두명의 친구들에게 야박하게 대한다는 것은 한심한 판단력일 수박에 없었다. 그런 판단력을 가진 학생들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공부를 열심히하는 학생들끼리 공책 서로 빌려주고, 모르는 것 가르쳐 주고, 공부방법 교환하고, 또 그래서 서로 더 친하고... 등등이 당연했다. 다만 흠이랄 것이 있다면 각자의 공부에 우선적으로 집중하다 보니 인간적으로 상대의 사소한 것에 대해서 관심을 적게 가진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랄까.

이 정도만 얘기를 해도 우리들에게 있어서 "서울대엘 간다"는 목표가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천박하기만 한 것이 아닌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이거나 비 인간적이거나 한 목표가 아니라 얼마나 노력하느냐 하는 것을 측정하는 목표일 뿐이었다. 어차피 서로 과외나 학원 등의 선택의 폭은 없었다. 과외 때문에 자율학습 안하고 일찍 귀가하는 학생은, 없었던 정도가 아니라 상상할 수 없었다. 일찍 귀가하는 학생은, 공부에 흥미가 없어서 선생님 몰래 놀러나가는 학생들 뿐이었다. 난... 그 학생들과 사실 더 친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3년을 그렇게 지내고 난 결과적으로 서울대엘 합격했다. 입학 시험을 치르는 날에도 혹시나 갑자기 시험 중에 생각이 안나거나 잠이 올까봐 한 2틀을 꼬박 굶었었다. 평소에 하루에 한끼만 먹었으니 그 한끼만 안먹으면 2틀동안 굶을 수 있으니 힘든 건 아니었다.

그렇게 고교 3년을 "일류대엘 간다"(서울대가 아니더라도 좋았다.)는 목표로 생활했는데, 이런 목표가 모든 학생들에게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상황에서 자기가 선택한 목표에 충실하게 노력하는 것은 괜찮은 것이라는 것 정도?

고등학교 졸업식날에는 어머님과 누나가 와서 꽃다발을 안겨주었고 중학교 동문 후배가 한명 찾아와서 꽃다발을 주었다. 친구들과, 그리고 선생님들과 사진을 찍었을 뿐 많은 사람들이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초라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뿌듯했다. 왜냐하면 후회없이 공부한 고교 3년이었기 때문이다. 원하던 대로 재수를 하지 않았고, 원하던 대학엘 들어갔다.

졸업식을 마치고 어머님, 누나와 함께 학교 근처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던 분위기가 기억난다. 축하객이 적어서 생기는 묘한 아쉬움과 그와 대조적으로 원하던 것을 충분히 얻었다는 이상한 만족감, 그리고 약간의 허무감까지 뒤섞여, 마치 독감으로 누운 이부자리의 마지막에서 일어나 창 밖에서 비쳐드는 햇빛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