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일종의 전쟁입니다. 철학적 사고 속에는 어떤 적이 있고 그 적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전술이 있으며 그러한 전략전술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전략적 요충지를 중심으로 상대를 공격하고 나의 제국을 완성하기 위해서 거대한 성을 쌓기 마련입니다. 그 성이 바로 철학 속에 있는 건축물이고 사상체계랍니다.”
산사의 여름 단풍이 내게 마음을 열기 전에, 우리는 만나면 주로 철학과 그림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여름 단풍은 약혼자가 있다고 내게 말했고, 그게 거짓말일지라도 나는 그 사람에게 호감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무적인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그림을 부탁했고 그 대신에 나는 틈틈이 철학에 대한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내 나름대로는 (혼자 생각이지만) 충분하지 않더라도 조금씩이라도 미리 그림에 대한 보답을 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철학 속에 있는 이 치열한 전쟁을 꿰뚫어보지 못하면 그 철학적 사상의 의미를 또한 이해할 수 없어요. 그리고 철학자들의 철학을 공부할 때 이 전쟁의 성격을 모르면 그 철학자들이 말한 것 하나하나를 쫓아가면서 ‘아, 이래서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구나’라고 동감할 수가 없을 거예요. 결국 그런 철학 공부는 수박 겉핥기식의 공부로 끝나버리게 되죠. 예를 들어 볼까요?”^^
……
소크라테스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상대주의와의 전쟁이다. 이 전쟁을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대화법이라는 전술과 추상적 존재라는 무기를 사용했다. 그리고는 소크라테스가 상대와의 철학적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의 계보가 형성된 것이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불리하게 몰려서 사형을 당했지만 말이다.(이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군. -.-;)
플라톤은 어떤가?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역사적 위업을 받아서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객관주의라는 제국의 거점으로서 이데아론을 제시하고 이를 전략적 요충지로 삼아서 그 주변으로 거대한 성을 쌓았다. 그 성 안에서 서양 철학의 모든 문제들을 탄생시켰다. 마치 군인들의 막사와 무기고, 식량 창고, 대포 설치대 등을 체계적으로 마련하듯이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 사람은 같은 족보를 계승하면서도 플라톤의 성과는 반대 쪽에 자신의 요충지를 마련하고 플라톤보다 좀더 발달된 정교한 성을 구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대인들이 철학적 전쟁을 할 때에도 즐겨 사용하는 많은 고급 전술들과 축성술을 발달시킨 셈이다. 범주, 판단, 실체, 질료 등의 개념들이 모두 현대인들도 여전히 사용하는 철학적 무기들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다 만든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적대적이 되었지만 이 양자는 또한 상대주의라는 전혀 다른 바다의 족속들에 대한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바다로부터 대륙을 일단 방어하는 가운데서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 하는 문제로 계속 대립하는 셈이다.
데카르트는 어떤가? 데카르트는 계보가 약간 애매해 보이지만 대체로 그 근본 혈통은 플라톤 쪽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합리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합리론이란 무엇인가? 경험보다는 이성을 우위에 두는 것이 아닌가? 이데아론에
더 가깝다. 하지만 구체적인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데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무기를 많이 사용했다. 그의 ‘실체’ 개념은 직접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배운 것이다. 데카르트는 오래 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두 왕국이 무너지고 난 후 암흑기가 그 대륙을 휩쓸어서
폐허가 된 곳에 새로운 집을 건설하기 위한 기초 공사를 하고 자기 성을 쌓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데카르트는 ‘의식의 명증성’이라는, 철학적 전쟁의 중요 거점을 설정했다. 그 후의 모든 철학자들이 이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고는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웠다. 경험론자들과 합리론자들이 그들이다.
칸트는 경험론자와 합리론자들의 전술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러면서도 그 철학적 색깔을 꼬집자면 아리스토텔레스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순수 이성의 역할과 경험적 내용이 어떻게 서로 결합하여 지식이 되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양자의 장점을 흡수하여 강력한 성곽과 전략전술 체계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헤겔은 이 칸트의 전술체계에 허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 허점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종류의 축성술을 개발했다. 그 축성술의 이름이 곧 “변증법”이다. 그건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처럼 실제 사물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세상에 관한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헤겔은 플라톤 편이다.
이 변증법은 너무 큰 성을 쌓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성의 효용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니체, 실존주의, 현대 경험론자 등이었다.
이러한 철학자들의 전쟁은, 대체로 철학이라는 두 겹의 대화 중에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 속에 포함된 전쟁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러 학문들이 점점 분화발전하면서 철학은 생각 자체에 대한 생각들에로 관심을 국한시키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다른 학문들과의 연관관계를 통해서 철학은 세상과의 대화를 유지하고는 있다.
그렇게 철학자들의 전쟁은 흘러갔는데…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 전쟁을 하는 철학자들이 아니라 나에게 말이다. 그건 여름 단풍이 처음엔 날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잡담을 하면서 내가 옛날에 좋아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모두 들려 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마치, “난 이렇게 예쁜 사랑을 했답니다. 부럽죠?”하는 기분으로 그런 얘기들을 틈틈이 자랑스레 말해 주곤 했다. 그래서 내 아내는 ‘비와 함께 내리는 시’나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불리는지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다.
덕분에 지금 우리 부부에게는 과거에 대한 비밀이 별로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