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철학자의 사상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철학자의 주장을 아주 당연하게 느낄 수 있도록 이해하는 것이다. 철학은 당연하게 이해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되었다고 할 수 없다. 선입견에 대한 비판이라는 철학의 본성을 이해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철학은 생각에 대한 반성이다. 그래서 그 생각에서 당연하게 가정되고 있는 것, 즉 전제에 대한 반성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선입견”이란 약간 나쁜 의미를 풍기면서 ‘전제’를 가리킨다. 그런데 전제란 이미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인데, 그 ‘당연한 것’에 대해서 왜 비판하고 반성하는가? 때때로 그것이 그렇게 당연하지만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 어떤 회사가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필기시험 중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었다.
“당신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의사,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은 단 한 명만을 차에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선택하시고, 설명을 하십시오.” |
말은 좀 복잡하지만 내가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이해할 것이다. 결국 상당히 당연해 보이는 전제를 반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더 당연한 전제를 바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들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철학자들의 생각은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굉장히 당연한 이야기, 그래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만한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생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려운 말들로 씌어있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다. 또 이런 문제도 있다. 누구를 태우느냐 하는 문제에서 불필요한 전제를 뛰어넘어 제시한 대답이 멋진 것이지만 그것을 잘 이해 못한다면 상당히 엉뚱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누구를 태울래? 라고 물었는데, 나는 이상형과 남겠다라고 대답했다. 엉뚱하지 않은가? 특히 그 철학적 문제에서처럼 그 전체적인 생각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에. 그래서 철학자들의 생각은 어떤 부분에서 매우 엉뚱하게 보인다. 그것을 좋게 보자면 심오하게 보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좀더 적극적인 이해를 하자면, 단지 심오하게만 보이고 당연하게는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저 유명한 철학자를 치켜세우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의 생각을 제대로 충분히 이해한다면, 그들의 사상은 심오하고 난해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것, 그래서 이해가 됨에 따라서 저절로 고개가 어느 정도는 끄덕여지는 것이어야 한다.
……
이런 얘기들을 내가 ‘산사의 여름 단풍’을 만났을 때 들려주었다. 그 사람이 철학 공부에 관심 있어 했기 때문이다.
그럼 ‘산사의 여름 단풍’이란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냐고?
나도 이 문제를 우연히 봤을 때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고는 망설임 끝에 굉장히 평범한 답을 제시했다. 나의 답은, 아마도 할머니를 태운다는 것이었던 것 같다. 이유는, 그래도 당장 죽을 사람을 살리는 것이 급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제시했던 회사는 단 한 명의 직원을 채용했고, 그 사람이 제시한 답은 이랬다. 차 열쇠를 의사에게 줘서 할머니를 태워 병원으로 가게 하고 자신은 꿈에 그리던 이상형의 사람과 함께 비를 맞으면서 버스를 기다린다는 것.
멋진 대답이지 않는가? 나는 그 대답을 보고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나의 탄성을 자아내는 그 멋진 대답은 왜 멋진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의 틀을 넘어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으로써 우리 앞에 주어진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했다는 데에 있다. 이 두 가지 이유가 하나로 묶여서 멋진 대답이 되고 내 탄성을 자아낸다.
여기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의 틀이란 전제이다. 한편 우리가 생각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 당연한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별로 생각할 것은 없다. 왜 생각에 대해서 생각하는가? 그 생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대체로 당연하게 생각되는 생각의 보이지 않는 요소들, 즉 전제들에 문제가 있어서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전제에 대해서 비판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고, 철학적 사고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당연해 보이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반성해서 어떤 방향으로 생각을 발전시켜야 할까? 좀 이상한 쪽,
덜 당연한 쪽인가, 아니면 더욱 당연한 전제 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쪽인가? 이상한 쪽으로 생각을 발전시키자면, 예를 들어서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를 내가 병원에 태워다 줌으로써 낫게 할 수 있다라는 전제를 의심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계속 자동차를 운전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기 보다는 “병원이 정말 할머니를 치료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즉 별로 당연해
보이지 않는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 더욱 당연한 전제를 희생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해서, 어떤 사람이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다 주는
과정에서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으므로 나는 이상형의 사람을 태우겠다”라는 대답을 제시한다면 아무도 동감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