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의 범주에는
하나의 항목이 더 있으니
그것은 당신의 이름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든
당신의 이름이 그 형식으로
따라붙으니까요.

내 판단의 형식에는
하나의 형용사가 더 있습니다.
개념과 개념이 연결될 때
그것들을 아름답게 꾸미는
그대 이름이.

내 추리의 형식은
4단 논법입니다.
3단 논법의 끝에서
그것이 당신과 어떤 관계인지
항상 물으니까요.

그렇게,
내가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은
내 마음 속 순수지성의 형식에
이미 당신의 범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칸트의 철학, 그의 생각은 설득력이 큼에도 불구하고 역시 완전하지는 않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철학 속에 있는 두 겹의 대화 중에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는 앞에서 본 경험론의 철학에 들어있는 문제, 즉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서 실패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칸트 철학이란 어떤 것인가? 지식에 대한 물음에서 주관적 요소(순수 감성의 형식과 순수 지성의 형식)와 객관적 요소(각감적 내용)가 결합되어서 지식이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주관과 객관이 각자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먼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주관과 객관을 먼저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의 지식 속에서 어떤 부분이 주관에서 왔고 어떤 부분은 객관에서 왔다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관과 객관이 결합하기 전의 상태에서 그 객관, 즉 우리 의식과 떨어져 있는 그 외부 세계를 칸트는 ‘사물 그 자체’라는 뜻으로 “물자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칸트가 우리의 지적인 사고력으로는 원천적으로 주관 안에 들어와 있는 표상의 세계 너머로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는 데에 있다. 즉 우리의 생각은 모두 표상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표상을 넘어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어떤 생각이 표상을 넘어서 나간다면 그건 이미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표상 너머 저 쪽에 있는 ‘물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알 수 있었기에 칸트는 자신의 철학 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는가? 아주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칸트의 철학에 대해 야코비라는 철학자가 이렇게 비판했다고 한다.

“물자체의 개념 없이 칸트 철학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물자체의 개념을 가지고서는 칸트 철학 안에 머무를 수가 없다.”

 

물자체란 무엇인가?

칸트 철학은 설득력이 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칸트가 위대한 철학자가 된 거지만 말이다.

여전히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에 대한 나의 생각이 옳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것이 옳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을 뿐 그 사람을 내 운명 속의 연인이라고 알아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내 마음 속에 어떤 사람이 나의 연인이 될지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보고 싶던 사람을 만났으므로 난 너무나 기뻤지만,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은 처음에 만났던 때와 많이 변해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점심을 한 번 더 같이 했을 뿐 연락을 끊었다. 미련은 없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저 그 사람을 한 번 더 만나 보는 것 이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또 긴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날 모르는 사람에게서 메일이 왔다. 어떤 메일이었냐면 나의 철학 홈페이지를 보고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면서 보내는 인사 메일이었다. 그 메일의 배경에는 예쁜 파란 병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는데, 전공이 “가을에 실려 온 동화”의 대학원 전공과 같았다. 그 사람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전공을 바꾸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곧 나의 연인이 될 사람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우스운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나의 감성은 동화의 껍질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이해해 달라. 사실은 나도 다른 사람처럼 항상 여자 친구를 기다리던 그런 사람이고, 또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과 사랑해서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 때 일에 대해서 특별한 ‘예감’, 혹은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다고 왜곡된 기억을 갖게 된 것일지 모른다. 어쨌거나… 내가 그 때 나름대로 뿌리칠 수 없는 기대감을 가지고 한 여자를 만난 것, 그것은 어떻게 포장이 되든 변하지 않는 일이니까.

칸트 철학은 여기서도 내게 적용된다. 나는 그 사람을 처음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서 그 사람의 얼굴에서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또 다른 예감을 했다. 그것은 이 사람이 날 싫어할 것이라는 것이었고, 그런데 결국에는 이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이 날 싫어할 것이라고 예감했으면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 예감했어야 하지 않는가.

어쨌든, 칸트 철학으로 일부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마음 속 순수지성의 형식 속에 이미 그 사람의 범주가 들어 있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선험적 형식과 경험적 직관이 결합하여 인식이 성립한다는 칸트의 생각처럼, 나도 내 마음 속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맞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이번에는 착오 없이 그 사람을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