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여름 단풍

이 시는 내가 어떤 사람을 두 번째 만나서 선물해 준 시이다. 처음 만난지 한 달 반쯤 지난 후였다. 그 동안에 그 사람은 단청 보수 작업 및 그에 관한 공부를 한다고 약 한 달 정도 절엘 들어가 있었다. 두 번째 만날 약속을 정하면서 그 사람이 내게 보내 준 메일의 편지지에는 예쁜 빨간 사과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런 편지지를 보면서 그 사람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절 지붕에 올라 앉아 작업했을 모습을 상상하다 시를 하나 썼고, 그 시를 문방구에서 산 작은 파란 병 안에 넣어서 선물했다. 그 시의 제목이 “산사의 여름 단풍”이다.

하나의 사건이 있으면 그것은 ‘정’이 된다. 그러면 헤겔의 철학에 따라 거기에는 ‘반’이 뒤따르게 된다. 산사의 여름 단풍을 세 번째 만났을 때 그 사람은 자기가 이미 약혼한 약혼자가 있다고 내게 말했다. 그 사람은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고. 골 키퍼가 있다고 골을 못 넣나…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내 사고 방식은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거짓말이었고, 그 사람이 거짓말을 잘 못해서 그 날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서도 그것이 거짓말임을 얼핏 느낄 수 있었지만, 나의 실망은 무척 컸다. 나는 참된 사랑이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과 반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합’이다. 우리는 어떻게 잘 되었을까?

나는 그 사람에게 내 책에 들어갈 삽화 작업을 부탁했고 그 일 때문에 그 사람이 날 부담스러워했지만 여러 번 더 만나야 했다. 나도 ‘이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며 일을 핑계로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 하지만 결국에는 결혼하게 될 거라는 예감을 했었지만, 그런 예감은 내가 상황 속에 있을 때는 항상 잊혀진다. 그래서 나도 실제로 희망을 가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이런저런 일로 계속 만나면서 우리는 그림과 철학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했다. 그 사람은 포스터 모더니즘에 몰입해 있었고, 나는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철학에 대한 얘기들을 쉽게 설명해 주려 노력했고, 때로는 그림에 대한 나의 견해들을 제시해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산사의 여름 단풍은 항상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내 얘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자 그 사람의 태도도 많이 바뀌었고, 나중에는 사실 약혼자가 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예전에 사귀다가 헤어진 사람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 그것이 미안해서 내게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가고 봄이 되자 여름 단풍(줄여서^^)은 과거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나랑 결혼을 약속했다.

이렇게 정반합의 과정으로 일은 진행이 되었는데… 만약 여러분이 헤겔 철학을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이해하고자 했다면, 방금 내 경험 속의 일이 진행된 것과 앞에서 내가 설명한 헤겔의 변증법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원래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은 인식이 확장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방금 내 경험에 적용한 정반합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것인데, 사실 그것은 헤겔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유물론 철학자들이 설명한 변증법이다.

유물론자란, 정신이란 없고 세상은 물질적인 것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정신이 궁극적인 실재라는 헤겔 철학의 부분은 버리고 변증법만을 받아서 전혀 다른 토대에서 발전시켰다. 물질적인 토대 위에서 발전시킨 변증법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정신적 토대 위에서 변증법이 인식의 확장과 발전을 설명하는 것이었다면, 물질적 토대 위의 변증법은 사건의 결합과 발전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이야 어쨌건 우리는 여기에서 헤겔 철학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헤겔 철학, 혹은 그 중심에 있는 변증법은 공허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것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듯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서 내가 여름 단풍을 만났다가 결국에는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졌더라도 변증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 헤어짐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고 일종의 발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못할 상대에게 감정이 매어있는 것보다도 새로운 만남을 위한 이별이 더 나을 테니까. 결국 그러한 헤어짐도 합이 될 것이다. 똑같은 진행과정에서 전혀 반대의 결과가 나와도 변증법은 적용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을 생각해 보면, 거기에서는 대전제와 소전제가 같을 경우에 반대의 결론이 나올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이 죽고, 소크라테스가 사람이면, 소크라테스는 반드시 죽는 것이다. 3단 논법은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구별해 내는데, 변증법은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헤겔의 철학은 너무나 어려운 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예를 들어 보자.

" 부정성은 점으로서 공간과 관련을 맺고 공간 안에서 선과 면이라는 자신의 규정을 전개시킨다. 그러나 이 부정성은 자기 밖의 있음의 영역에서는 대자적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규정들로 있지만 동시에 자기 밖에 있음의 영역 안에서 정립하면서, 이때 정지해 있는 나란히 있음에 대해서는 무차별한 것처럼 나타난다. 이렇게 대자적으로 정립되면, 부정성이 곧 시간이다" F. 헤겔의, 『엔치클로페디』라는 책 257장에서.

방금 글을 읽으니 머리가 핑 돌지 않는가? ^^ 사실은 설명을 하는 나도 어지럽다. 주로 철학에서 어려운 용어들이 선택되는 것은 두 겹의 대화 중에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 때문이다. 즉 이론적인 정합성이 분명함을 보이기 위해서 그런 철학적 용어들이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헤겔의 설명은 지나치게 어렵고 난삽하다. 게다가 어떤 점에서는 공허하기까지…! 그래서 이러한 헤겔 철학을 버리면서 현대 철학이 시작된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런데 그 전에 개인적인 일 하나만 더 말하겠다.
위의 “산사의 여름 단풍”이란 시를 보면 마지막 연에 “……”가 있다. 그건 처음에 거기에 들어갈 말을 표시나지 않게 빼고 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내 과거 속의 여러 사람들에게 선물을 했던 기억이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이 사람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면 어떡하나 하는 망설임. 그래서 정말 영원히 사랑할 사람이 아니면 완전한 선물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맨 마지막에 만나는 사람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선물은 당신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중에 결혼을 약속한 후에 내가 거기에 빠진 문장을 채워 주었다.

파란 병에 든 편지가
빨간 사과향기에 물들면,

좀 유치하긴 하지만 이 두 줄이 내 선물을 완성하는 부분이다. 역시 헤겔 말대로, 부분은 불완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