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꽃피었던 시기가 지나고 나서 유럽이 중세로 들어서면 서양의 지성이라는 것은 대체로 종교의 시녀가 된다. 그 때에는 종교적 권위가 모든 것을 억눌렀고 그래서 지성과 문화의 발달에 있어서 그 시기는 ‘암흑기’라고 불리운다.

중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상대주의의 문제는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중세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것 이상의 절대적인 기준이 너무나 명확하게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기독교의 교리 말이다. 비유하자면, 이 중세 시대 서양 사람들의 생각은 상대주의의 바다가 아니라, 지나친 절대주의의 산꼭대기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도 경우에 따라서는 틀릴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고 이것은 곧 신에 대한 도전이 되어서 화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많은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서 강요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중세의 마녀 사냥은 그 사상적 강요에서 생겨난 우스꽝스러운 대표적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고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서 서양이 중세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서양의 철학에는 두 가지 과제가 생겨났다. 하나는 다양한 학문의 분화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근거를 발견하는 문제였다.

첫째, 다양한 학문이 분화 발전한 것이 왜 중요한지를 먼저 살펴보자. 애초에 서양에서의 "철학"(philosophy)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모든 학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학문들이 분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 안에 거의 모든 학문들이 다 들어있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 자신이 무엇을 전공하든 그 학문의 역사를 간단히라도 배우게 될 텐데, 그 때 그 과거를 더듬어 올라가면 모든 학문이 플라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철학과 유사한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학, 심리학도 그렇고 생물학, 물리학 등도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다가 학문들이 각 주제별로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나갔다. 르네상스시대부터 이것이 두드러졌다. 그렇게 되자 철학은 일반 과학들이 연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연구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겨났다.

둘째, 진리의 근거를 발견하는 문제란 상대주의와의 경쟁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원래 중세 시대까지는, 그래서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진리의 근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그냥 기독교의 교리, 즉 신의 말씀이 진리의 근거였다. 그런데 이제 그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제 학자들은 진리의 근거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 가장 멋진 대답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라는 것을 했다. 그게 무언고 하니, 절대적으로 옳을 수밖에 없는 진리를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는 것이다. 이것을 “방법적 회의”라고 부르는 까닭은,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방법적) 의심해 보는 것(회의)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 속에서 데카르트는 착각으로 잘못 보는 수가 있으므로 눈에 보이는 것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라고 생각하고, 또 계산을 할 때 실수를 하는 수도 있으므로 수학적인 것, 논리적인 것도 반드시 옳지는 않을지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의심을 해 나가다가, 해 나가다가… 멋진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게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저런 지식들이 모두 틀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때, 바로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생각이 곧 나의 존재를 보증한다. 그건 틀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데카르트는 여기에서 출발하여 학문의 체계를 건설한다면 말 그대로 ‘틀림없는’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진실부터 살려 나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간단한 서양 철학사 <5>: 데카르트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 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 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박노해의 “길 잃은 날의 지혜”에서>

 

이것이 데카르트 철학의 핵심적인 생각인데, 사실 여기에서만 그쳐서는 데카르트 철학을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한번 돌이켜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잘 드러나듯이 유명한 철학자의 사상이란 거대한 생각의 체계이다.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부분일지라도 그 한 면만을 보고 그 철학자의 사상을 다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체를 다 설명하자면 복잡하고 지루하고 어렵기 때문에 조금만 더 설명하고 정리하겠다.

데카르트 철학은 진리의 기준과 함께 당시 시대의 다른 요구에도 부응했다. 그것은 자연과학의 발달에서 온 것이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물리학이 발달하여 세계가 잘 설명되자 자유의지와 필연성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자유의지와 필연성의 문제란, 과학의 법칙으로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작동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생긴 물음이다. 그러면 인간도 기계적으로 작동하는가? 그래서 법칙에 따라서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가?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 도덕과 윤리에 따라서 “이래야 한다”, “저러면 안된다”라는 말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흘러갈 텐데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이원론을 제시하였다. 즉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인 ‘실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물질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때의 마음이란 곧 영혼이기도 하다. 물질과 마음의 구분은 그 전부터 사람들의 상식 속에 있었으므로 데카르트는 거기에 다른 내용을 덧붙였다. 그것은 물질과 마음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물질의 속성이 ‘연장’(뻗어있다는 뜻)이고 마음의 속성은 사유(생각한다는 것)라고 주장했다.

데카르트 철학이 제시한 또 다른 하나의 주장은 지식의 근원에 관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지식,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중 많은 것이 경험에서 생기지만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도 특정한 경험 없이 이성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을 합리론이라고 한다. 즉 지식의 근원이 경험만이 아닌 합리성에도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 철학은 다른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 자리잡고 있다. 여러분이 다음과 같은 시를 읽으며 영혼과 육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거기에는 데카르트의 그림자가 배어 있음을 알라. 그 그림자의 이름은 “심신 이원론”이다.

 

영혼은 내 안에서 침묵한다.
가장 고요한 시간
목숨의 심지에서 영혼이
깨어나
불꽃으로 타오르면

나의 육체는 그릇이 되어
이끼 낀 샘물로 맑게 고이 떤다.
<이성선의 “영혼의 침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