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에 어떤 도령이 있었다. 이 도령은 그 마을에 사는 한 아리따운 낭자를 사랑했다. 두 사람은 꼭 결혼하자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그 낭자가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 도령은 크게 마음이 아파서 도가 높다는 노승을 찾아갔다. 그러자 그 노승은 이 도령의 천생연분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그 상대는 어느 시골 시장 바닥에서 물건을 파는 한 아낙네가 안고 있는 아기라고 말했다.
이 도령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도 마음이 아프지만 그런 볼품없고 너무 어린 아기가 자신의 배필이라는 점에 화가 났다. 또한 노승의 그런 말이 거짓이라는 것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사서는 그 아이에게 활을 쏘아 죽이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활을 쏠 때 누군가가 손을 치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고 화살은 살짝 빗나가서 아기는 죽지 않았다. 그 후 도령은 배필을 찾지 못하고 학문에만 관심을 쏟다가 나이가 들었다. 주위에서는 장가를 가라고 종용했지만 그는 장가갈 마음이 없었다.
그러다가 절친한 친구가 훌륭한 규수가 있으니 만나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 규수를 만나보게 되었는데,
그 규수를 보는 순간 그 도령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에 자신과 결혼을 약속했던 낭자의 모습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에
흉터가 하나 있는 것만이 달랐다. 도령이 물어보니 규수는, 자기가 어릴 때 어머니가 시장에서 자기를 안고 장사를 하셨는데 그 때 누군가가
쏜 화살에 다쳐서 이마에 흉터를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 규수는 옛날에 도령이 사랑했던 낭자가 죽던 날 태어난 사람이었다.
도령은 그 낭자를 만나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깨닫고는 그 규수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건 내가 어릴 적 “전설의 고향”이라는 방송에서 본 이야기이다. 평범하긴 하지만 인상적인 데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한편 내 감성은 동화같은 껍질로 포장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동화적인 말로 포장하고 동화처럼 세상을 볼 때가 있다. 내가 마음에 좋아했던 여자 친구들에게 인디언식 이름을 붙여주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 속에서 나는 ‘운명’같은 것을 생각한다. 방금 본 전설 속의 이야기가 나에게도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래서 나의 과거에 대해서 이렇게 꾸미곤 한다.
|
‘가을에 실려 온 동화’와 ‘비와 함께 내리는 시’,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연관관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볼에 짙은 보조개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대학은 달랐지만 같은 전공을 공부했다. 나는 가을에 실려 온 동화에게 “슬픔의 안나를 위하여 눈물로 적은 시”라는 노래를 피아노로 쳐 주었고 그 때부터 그 사람과 멀어지게 되었다. (내가 너무 못쳤나? -_-;) 그런데 비와 함께 내리는 시의 세례명이 ‘안나’라고 그랬다. 그 사람은 내겐 ‘슬픈 안나’였는데, 그건 그 사람이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많은 삶의 상처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슬픔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상처들을 말이다. 그리고 비와 함께 내리는 시가 나와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은 내가 가을에 실려 온 동화와 헤어질 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내게 이별을 고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이젠 날 만나지 않을 거라고… 이런 우연적인 일치들을 설명할 때 나는 두 사람을 알게 된 것이 내게는 어떤 운명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깔고 있는 것인데, 사실 때로는 스스로 너무 지나친 상상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의 유사성과 어떤 묘한 일치 때문에 나는 두 사람을 사귀었으면서도 마치 한 사람을 오랜 시간 간격을 두고 사랑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
앞의 전설은 정말 운명적인 이야기같지만 내 이야기는 조금 억지같다구?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 얘기도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노력해 볼 수 있다. 여전히 억지이거나 궤변일 수 있겠지만, 철학 공부 삼아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좋은 생각은 문제가 있는 생각과 싸우면서 발전하니까.
나는 두 가지 점에서 내 이야기도 운명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앞의 전설과 내 경우가 사실은 중요한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앞의 전설은 정말 전설같지만, 내 경우는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 그래서 운명이 있다면 내 이야기처럼 나타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둘째 논점은 별로 이야기할 거리가 많지 않다. 단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만약 운명이 있다면, 전설처럼
죽은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한 여자가 옛날에 선비가 쏜 화살의 흔적을 이마에 남긴 채 ‘정말 현실 속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정말 그럴 거라고 기대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나는 모르겠다. 우리가 “운명”보다는 약하지만 그와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는 “인연”을
생각할 때, 예를 들어서 여러 사람을 통해서 선을 10번 정도 봤는데, 우연히도 같은 사람을 맞선에서 두 번 만나게 되어서 ‘인연인가보구나!’하고
생각하며 결혼하는 정도가 현실적으로 있을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 정말 내 경우와 전설 속의 이야기는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없는가? 나는 정도 차이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선비는 옛날에 사랑했던 낭자와 새로 만난 낭자의 외모가 ‘똑같다’라고 말할 정도로 매우 닮았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는다. 그 외모가 얼마나 닮았을까? 정말 손톱만큼도 틀리지 않고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차이가 좀 커지면 어떨까? 일란성 쌍둥이 정도로 닮으면 실제로 차이는 있지만, 같은 사람이라고 보게 될 것이다. 다시 그 차이가 더욱 더 커져서 같은 전공을 공부하고 양 볼에 인상적인 보조개가 짙게 있다는 것 정도면 왜 안되는가? 게다가 첫 번째 낭자가 죽던 날 새로운 여자가 태어났다는 연관관계처럼, 내가 한 사람에게 들려 준 “슬픔의 안나를 위하여 눈물로 적은 시” 피아논 곡의 ‘슬픈 안나’에 꼭 어울리는 사람이 두 번째 사람이었다는 것도 비슷하지 않은가?
이런 방식으로 따져 나간다면 웬만해서는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까지 갈 수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과연 그럴까…?’하는 생각도 지우지 못할 것이다. 분명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생각의 기준을 마련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기준을 마련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
|
새로 만난 규수가 옛날의 그 낭자일까? 모습이 똑같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옛날의 낭자와 훗날의 규수가 같은 사람이라고 하려면 그 바탕에 어떤 동일한 것이 놓여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것이 있을까? |
이와 같은 맥락의 문제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대답을 제시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런데 객관주의자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변화를 설명하고자 할 때 겪는 어려움은 바로 상대주의로 빠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것이 변화하는데, 그렇다면 그 속에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변화에 따라서, 그 변화의 단계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고 변화에 상대적이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에 앞선 철학자 한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 사람은 파르메니데스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플라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의 핵심적인 주장은,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세상은 존재하는 것으로만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 비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하는 것이 비존재가 될 수 없고 비존재 또한 존재하게 될 수도 없으므로 세상에서 변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우리 눈에 보이는 변화는 단지 환상일 뿐이라고 파르메니데스는 주장했다. 이런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두 겹의 대화에 있어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분명했다. 즉 말이 되는 것이었다. 다만 세상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실제로 세상의 모든 변화가 환상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철학자들에게는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의 장점인 논리적인 강점을 살리면서도 단점을 극복하여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
플라톤에게서 변화하지 않는 것, 그래서 진정 존재하는 것은 이데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와 속성을 구분하였다. 그리고는 실체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이 속성을 가지기도 하고 저 속성을 가지기도 하여 변화하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앞에서 얘기한 전설 속의 낭자와 규수를 이어주는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은 바로 실체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실체는 어떤 것일까? 옛날의 낭자는 죽어서 그 몸이 땅에 묻혔고 훗날의 규수는 새로 태어나 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변화하지 않는 실체는 무엇인가? 영혼?
그렇다면 우리는 데카르트의 철학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체 개념을 훗날 데카르트는 “실체에는 영혼과 물질 두 종류가 있다”라고 말하며 확장했던 것이다. 이런 데카르트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영혼과 물질이 서로 다른 실체인데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원활하지 못했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생각하는 인간사의 일을 잘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즉 세상과의 대화가 어느 정도 원활했기 때문에, 데카르트 철학은 그 시대에서 폭넓게 이해되었다.
그럼 나의 경우에, ‘가을에 실려 온 동화’와 ‘비와 함께 내리는 시’ 두 사람을 한 사람처럼 느끼는데 이런 나의 태도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실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실체가 그 밑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플라톤 쪽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플라톤의 이데아는 ‘특징들의 덩어리’가 아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비슷한 특징들 몇 가지와 묘한 연관관계 몇 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금방 어떤 이데아를 공유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데아란 삼각형, 동그라미, 혹은 책상의 원형과 같은, 매우 분명한 추상적인 실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전설 속의 이야기는 영혼이라는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그것이 진정한 운명의 이야기라는 답을 내리고, 반면에 내 경우에는 그 속에서 ‘한 사람’을 구성하기 위한 실체를 찾을 수 없으므로 단순히 우연들이 묘하게 중첩된 것이라고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의 동화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 모든 것에 대해서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일상 속에서 부족함이 없던 내 마음을 그토록 강하게 잡아당기던 그 예감은 다 뭐란 말인가? 마치 잔잔한 연못 위에 누군가 돌을 던지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물살처럼, 혹은 사방이 막힌 따스한 움막 안에 누군가 부채질 하지 않으면 일지 않을 바람처럼…
|
꽃이 피는 시간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