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 2학년 때 만났던 그 사람, 어쩌면 내 운명에서 진실로 첫 사랑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때는 알아보지 못했던 그 사람을,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라는 긴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만나 좋아했던 첫 사랑의 사람은 “가을에 실려 온 동화”라고 부르고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만나 결혼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을 부를 때 내가 쓰는 이름은 “비와 함께 내리는 시(詩)”이다.

한 때 유명했던 옛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와 비슷한 이런 (인디언식^^) 호칭을 내가 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금은 만날 수 없게 된 이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기본적으로 존중하는 방식이고, 또 그 사람들이 나에게 베푼 호감들에 대해 내가 고맙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준다는 것을 나는 소중하게 생각하고 표현하려 애쓰는 편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그만큼 내가 사람들로부터 별로 사랑을 못받는다는 얘기겠지? 쩝… -_-;)

“가을에 실려 온 동화”와 “비와 함께 내리는 시”는 그 사람들에게 내가 해 준 선물의 이름이다. 어떤 선물이냐면, 그 사람을 처음 만나던 날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서 쓴 글이었다. 이제 만날 수 없게 된 그 사람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고, 그렇다고 가명을 쓰자니 그 이름들에 대한 애착이 남아서 가명을 쓰기도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인디언식 호칭을 쓰는 것이다. 한편,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는, 선물의 제목이 아니고 내가 그 사람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한 구절이다.
끝으로, 내가 마침내 만나서 결혼해 잘 살고 있는 아내의 이름은 “산사의 여름 단풍”이다. “산사의 여름 단풍”도 내가 아내를 두 번째 만나던 날 해 준 선물의 이름인데, 짧은 시의 제목이다.

이제 이 이름들을 가만히 보면서 그 연관성을 찾아보면 우리는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와 ‘산사의 여름 단풍’의 관계, 그리고 ‘가을에 실려 온 동화’와 ‘비와 함께 내리는 시’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먼저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의 이름 속에 있는 ‘집착’, ‘인연’이라는 말들이 ‘산사’라는 절의 호칭과 비슷한 부류의 이름이다. 즉 불교적인 용어란 특징이 있다. 한편 ‘가을에 실려 온 동화’와 ‘비와 함께 내리는 시’는 서로 비슷한 이미지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이름들이다. 즉 ‘가을-동화’와 비-시(詩)‘의 구조를 가진 이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명씩의 사람들이 내게는 한 사람의 변화된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이 별로 이상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가을에 실려 온 동화’와 ‘산사의 여름 단풍’이라는 이름에도 어떤 면에서는 유사성이 있다. 둘 다 계절에 대한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런 유사성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다. 두 사람은 대학원에서 같은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인 것이다!!! -_-;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감각적인 예를 들었지만, 이제 그 예를 버리고 설명해 보겠다.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철학적 사고의 핵심은 표면적인 사물들의 밑에 있는 것에 대해서 직접 생각했다는 데 있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저변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것이다. 앞에서 에우튀프론과 대화한 내용을 기억해 보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물었다.

 

내가 자네에게 부탁한 것은, 많은 경건한 일들의 예가 아니라, 모든 경건한 일을 경건한 일이 되게끔 하는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크라테스는 ‘경건 그 자체’에 대해서 묻는다. 경건의 구체적인 예들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을 묻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철학은 어렵고 따분해 보이는 학문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구체적인 것은 입장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이 많지만 추상적인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즉 추상적인 것 속에서 객관적인 것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 최초의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 철학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객관적인 진리가 있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상대주의자인 소피스트들과 싸웠다는 것,
둘째, 객관적인 것을 찾기 위해서 추상적인 것에 대해 직접 생각했다는 것.

소크라테스 이후에 이루어진 철학은 바로 이러한 추상적인 것들만으로 채워진 철학이 되었다. 곧 보게 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부터 그것을 본격적으로 보게 알게 것이다. 추상적인 것들로만 채워진 철학은 어렵고,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끝내 불평을 하곤 한다. 하지만,

  현자는 무엇을 더 많이 아는가?
태권도와 자신이
똑같이 비어있음을 안다.
<“하얀 도복에 검은 띠를 매고”의 <태백>에서>
 

태권도만 비어 있을까? 철학도 비어 있다. 그래서 또한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의미

지금까지의 내 말을 들으며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나는 안다. 왠지 무슨 궤변에 속아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갖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런 궤변을 늘어놓은 것은, 소피스트들이 어떻게 변설을 늘어놓았고, 그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대응한 방식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더 인상적으로 대비시키기 위해서이다.

자, 내가 소피스트라면 여러분은 소크라테스가 되어 볼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내 설명을 반박할 것인가? 각 사람들에게 붙인 이름은 내가 내 감정과 우연에 따라서 붙인, 우연적인 이름이고 그것은 그 사람들 서로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만약 각각의 사람들 간에 어떤 유사성이나 연관성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 ‘자체’를 봐야지, 그 사람의 이름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내가 제시한 궤변과 여러분이 제시한 소크라테스적 반박의 초점은 각각 어디에 있는가?

궤변은 구체적이고 피상적인 여러 가지 특징들에서부터 출발해서 다른 사소한 특징들로 옮아간다.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와 ‘산사의 여름 단풍’이라는 별명에는 불교적인 용어가 들어있어서 두 이름이 닮았다고 말하듯이. 그리고는 결국에는 거기에서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그 결론은 피상적인 특징에 관한 결론이 아니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한 사람인 것처럼 연관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소크라테스적 반박은 문제가 되는 그것 자체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가을에 실려 온 동화’이든, ‘비와 함께 내리는 시’든,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결론이 그 사람들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니까- 이런 것이 쉽게 설명한 소크라테스적 사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