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

데카르트를 기점으로 해서 철학의 관심은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바뀌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생각해 본다면 이전에는 존재론이 중심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진정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가 진정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거기에서부터 철학이 시작되고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거기에 모아졌다. 그러다가 데카르트부터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 때부터 앎의 문제, 곧 인식의 문제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인식은 특별한 인식이 아니다. 철학에서는 아주 평범한 인식에 대해 주로 말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 철학 강의를 들으러 강의실에 들어가면 교수님으로부터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이 책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혹은 “저기에 저 소나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와 같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철학이 이렇게 평범한 인식, 즉 평범하게 보고 듣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평범한 인식이 가장 흔한 인식이고, 가장 많은 인식이며,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을 아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은 우리가 아는 것 일반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가를 묻고 대답하고자 한다.

어쨌든 그래서, 철학하는 사람들은 ‘이 책상’, ‘저 소나무’ 등에 대해서 따지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진진할까? 따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데카르트 이후로 펼쳐진 인식론 중심의 철학들을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이미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인식이 아닌 조금 특이한 인식의 경우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서 예감 같은 것 말이다. 이런 건 어떨까?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 그 아가씨와는 같은 대학이었지만, 그렇게 어긋나고 난 후 우리는 아주 가끔 우연히 지나치듯 만나곤 했다. 그리곤 긴 시간이 흘렀다. 난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왔다. 대학원에 복학했을 때 나는 그 사람이 생각이 났다. 새롭게 그 사람을 사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옛날 친구를 만나듯 한번 얼굴을 보고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를 했는데, 그 사람은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 우리가 특별히 사귀지는 않았지만 또 특별히 서로 나쁜 인상을 준 적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실망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나기를 포기했다.

그런데 다시 2년의 시간이 흐르자, 이상하게도 그 사람을 꼭 만나고 싶었다. 왠지 한번 꼭 만날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종의 예감처럼 그랬다. 스스로도 좀 이상하리만큼. 파란 옷만 입고 다니는 ‘이상한 사람’에게 여자들이 큰 호감을 갖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게 호감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있게 매달리지 못한다. 사실… 자존심 상하기도 해서 매달리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때는 예외였다.

다시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 사람은 그 때, 아주 힘없는 목소리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그 때는 풀죽은 목소리였지만 2년 전처럼 차가운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전화 대신에 매일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 편지들 속에서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 갑자기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인상이 있어.
그건 세파에 묻혀서 가까우면서도 먼 곳에서 자꾸 어긋나며 애타는 그런 것…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데
왜 그런 느낌을 받는 걸까?
……

편지는 매일 보냈다. 그냥 열심히 썼다. 답장은 당연히 오지 않겠지. 내 편지를 보다가 마음을 돌리지도 않겠지. 나라도 마음을 돌리지 않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부터 내가 쓴 편지들은 반송되어 오기 시작했다. 반송된 편지를 보니 편지함에 방치되어 있어서 반송된다고 씌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엽서로 바꾸었다. 그 사람이 내 편지를 받지는 않더라도, 편지함에 방치하기 위해서 다른 편지랑 서로 골라내기는 하겠지. 그렇게 조금이라도 읽게 되겠지, 뭐 그런 생각이었다. 그걸 읽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물론 엽서들도 모두 하나씩 반송되었다.

그렇게 약 한 달 이상 동안 매일 편지를 쓰다가 마침내 나는 그만 써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포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뭔가 기대하고 편지를 쓰기보다는 어떤 기분에 휩쓸려서 편지를 썼던 것이니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 사람에게 엽서를 썼다. 거기에 뭐라고 써서 보냈냐면,

… 이젠 너를 귀찮게 하는 엽서나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일도 그만할께.
그런데, 내가 너에게 왜, 답장이 오지도 않을 편지와 엽서를 써서 보낸 줄 아니?
그건 내가 그렇게 매일 편지나 엽서를 써서 보내면 언젠가 네 마음이 돌아서서 날 한번쯤 만나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그 매일의 편지글 속에 나의 집착이 쌓이고 쌓여 어느덧 인연이 되면 우연히 길을 가다가 멀리서라도 너를 한번쯤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단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