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철학이 갖는 시대사적인 의미를 간단히 ‘근세 철학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특징은 철학의 중심을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옮겨와 버린 것이다. 뭐, 여기에 대해서 많은 왈가왈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철학 비전공자들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그 이전의 철학이란 극단적으로는 기독교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플라톤 철학을 원용하면서 말을 만들었지만 하늘나라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각종 신비한 ‘소설’들이 쏟아지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성경에 그렇게 씌어있노라고. 그렇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것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철학적 토양을 본격적으로 확립한 사람이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 철학에도 존재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인 실체에는 세 가지가 있으며 그것은 신과 영혼, 물질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실체로서의 신은 실제로 세상을 설명하는 데에 역할을 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흔히들 데카르트가 영혼과 물질 두 가지 실체를 제시하는 이원론을 주창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가장 유명한 말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듯이 그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식론이다. 즉 우리가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 출발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새로운 문제거리였다. 그리고 그 기본적인 저의는, 기독교 철학이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말하는 것들 중의 일부, 특히 세상이 이렇게 생겼고 이런 것들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어떻게 비판했는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물은 것이다. 방법적 회의, 즉 모든 것을 의심해 보는 것, 그 다음에 가장 확실한 것만을 하나씩 짚어나가는 것이 바로 이런 비판을 강력하게 무장하는 방법이다.


이상을 쉽게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가 굳건한 땅 위에 놓여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튼튼해 보이던 땅은 흙이나 돌로 메워진 것이 아니라 단단한 얼음 덩어리에 불과했다. 공기가 차기 때문에 얼음이 얼어있듯이 인류의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독단이 삶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온도가 높아지면 얼음이 녹듯이 인류의 문명과 지식이 발달하면서 종교적 독단의 힘도 녹아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망대해로 휩쓸려 들게 되었다. 이 때 바다란, 처음부터 내가 비유했듯이 ‘상대주의’를 말한다. 얼음이었긴 하지만 남극 빙하 위에서라도 사람은 거기에서 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지만, 얼음이 녹으면 물에 빠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독단 위에서라도 당분간 사람들은 생각을 구축할 수 있지만, 그 독단이 의심받아서 기준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상대주의의 바다에 빠져 아무런 생각도 발전시킬 수가 없게 된다. 이제 새로운 땅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의 건축물을 세울 새로운 땅을. 그건 바다 위에 세울 수 없으니까. 그 때 섬을 발견하고 “저기에 섬이 있다!”라고 외친 사람이 데카르트이다. 그 섬은 인간 의식의 직접적 자명성이다.
<이런 비유는, 데카르트에 대한 헤겔의 평가를 변형하고 확장한 것이다. 헤겔은 데카르트가 망망대해에서 제일 먼저 섬을 발견한 사람과 같다고 평가했다. 나는 거기에 종교적 독단이 빙하와 같은 얼음과 같은 것이라는 비유를 덧붙인 셈이다.>
(“직접적 자명성”을 쉽게 말하자면, 우리 생각에서 의식은 의심할 바 없이 직접 확인되고 매우 분명하다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어떤 철학자의 사상을 공부하다 보면 그 철학자와 같은 방식으로 여러 가지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나도 내가 찾는 운명적인 사랑에 대해서 데카르트적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오래 동안, 약 10년 동안 ‘집착이 쌓여 인연이 되고’란 사람이 어릴 적 나와 사랑할 운명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중세를 지배했던 종교적 신념과 같이 근거 없는 생각인가? 그렇게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점이 있다. 그 당시에 그 사람은 진정으로 나에게 호감을 먼저 보여준 여학생이었고 나도 사귀고 싶은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자기에게 호감을 보여주는 사람이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 경우는 흔하지만, 서로의 마음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게 어떤 사랑을 할 수 있는 운명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에게는 그렇게 사소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만으로 남겨두고 싶지는 않다.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확실성을 찾아 나섰던 데카르트처럼 방법적 회의를 해 볼 수가 있다. 즉 스스로 의심해 보는 것이다. 내 마음에 들었지만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여학생들 중에서 사실은 날 좋아했던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혹은 ‘집착이 쌓여…’ 그 사람이 사실은 날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는가. 혹은 두 사람이 서로 좋아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운명이 작용해서 사랑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을 수도 있지 않는가. 이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부정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나의 운명적 사랑이라는 것은 틀릴 수 있지 않는가.

좀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자. 이 모든 생각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이미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는 전제 위에서 누가 나의 운명적 사랑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운명에 대해서 방법적 회의를 적용해서 운명이 없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이루어질 것이고 동화적인 운명,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모순은 없다. 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찾아낸 데카르트처럼 운명의 존재를 확신하기 위한 생각의 출발점을 찾을 수가 없다. 운명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운명에 대한) 인식론에 의해서 (운명의) 존재론이 결정된다.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그래서 나는, 그런 예감이 없어도 누군가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진정으로 ‘가을에 실려 온 동화’나 ‘비와 함께 내리는 시’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데카르트의 철학이 믿을 만 하다면 그의 심신 이원론도 믿을만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마음이나 영혼이 실체가 되어서 이 세상의 중요한 것들의 존재를 형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운명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실체가 될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어떤 사람과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거나 다시 사랑하기로 약속했을 수가 있고, 그 전생의 사람들이 죽어서 나는 그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이들은, 동일한 영혼을 토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운명이 존재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럼 어느 쪽이란 말인가? 데카르트 철학은 양쪽에 대해서 모두 답을 주는 것인가? 엉터리가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는 말했다. 철학은 안식처와 같은 결론이 아니라 어디로도 갈 수 있는 길이라고. 길을 안다면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모든 길은 원래 일방통행이 아니니까.

난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많은 철학적 생각의 뒤편에서 아주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화가 소곤거리고 있다.

 

“오빠는 여자 친구 있어요?”
“그럼, 있지.”
“어떤 언니예요? 얘기해 주세요.”
“그럴까? 그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