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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논리학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

 


다시 말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3단 논법이라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코끼리의 코나 꼬리에 해당되는 설명이다. 전체도 아니고 핵심도 아니다. 그냥, 쉽게 말할 수 있는 초점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여러분들이 논리학에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와 같은 이유로 생각을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바르게 생각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생각에 대해서 생각(비판적 사고)을 해 보았다. 말 그대로 "생각에 대한 생각"을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생각의 가장 단순한 요소는 "개념"이며, 이 개념들이 결합해서"판단"이 되고 다시 판단들이 결합해서 "추리"가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상세히 설명할 수도 있지만, 아마도 표로 간단히 정리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구분

의미

특징

개념

생각의 최소 단위

나무, …이다. 파랑, …도 등.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판단

개념+개념

모든 새는 날개가 있다.

맞다, 틀리다를 판단할 수 있다

추리

판단+판단

나무는 뿌리가 깊다. 그러므로 이 나무는 튼튼하다.

타당하다, 부당하다를 판단할 수 있다.


개념, 판단, 추리는 각각 생각의 단순한 요소에서 복잡한 단위로 구성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개념은 영어와 같은 언어에서는 모든 낱말에 해당한다. 하지만 한국말과 같은 굴절어(조사와 어미가 많은 언어)에서는 조사와 어미들도 모두 개념을 갖는다. 예를 들면 “나는 학생이다”는 3개의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나’, ‘학생’, 그리고 ‘…는 …이다’라는 개념이다. 하지만 “나도 학생이다”는 4개의 개념을 포함한다. ‘…도’는 ‘역시’라는 뜻이기 때문에 별도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어떤 것이 붙어서 조금이라도 의미가 달라지게 되는 것은 모두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판단은 문장의 형태로 표시된다. 그래서 모든 판단은 맞거나 틀리다. 2009년 12월의 한 인터넷 포털에는 “운전자 없이 도로 주행 전기차 ‘있다? 없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떴다. 이 때 “운전자 없이 도로를 주행하는 전기차가 있다”라는 것은 하나의 판단이다. 이 판단은, ‘실제로’ 무인 자동차가 2009년 12월에 도로를 주행할 수 있는 무인 자동차가 있을 경우에만 맞다. 흔히 “참이다”라고들 말한다. 물론 없을 경우에는 거짓이 된다. (이 판단은 참이었다. 실제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인지로봇연구단 강성철 박사팀은 여러 센서에서 추출한 정보를 종합해서 각종 시설물과 노상의 연석 및 차선을 인식하며 안전하게 주행하는 전기자동차 셔틀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판단들이 연결되면 추리가 되는데, 추리는 옳거나 그르다. 그런데 ‘옳다 그르다’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르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맞다 틀리다’라는 뜻으로도 쓰일 때가 있다. 그래서 어떤 추리가 옳고 그름을 가리켜서 별도로 부르는 말이 곧 ‘타당성’, ‘부당성’이라는 용어이다. 판단의 맞고 틀림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므로 타당성과 부당성에 대해서 초점을 맞춰 추가적으로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일단 올바른 추리라는 뜻을 가진 ‘타당한 추리’의 정확한 의미는, 그 전제들이 모두 참인 경우에 결론도 항상 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추리가 타당한가 여부는 그 전제와 결론이 항상 참인가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이다. “운전자 없이 도로 주행을 하는 전기차가 있다. 그렇다면 그건 일종의 로봇이다”라는 추리를 생각해 보자. 이 추리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운전자 없이 자기 혼자서 실제 도로를 주행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인식하고 스스로 조종해서 달려야 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자동차 로봇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태권브이나 휴보와 같이 인간형 로봇만이 로봇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자, 그런데 만약 지금 그런 무인 주행 전기차가 없을 경우에 이 추리는 타당할까 부당할까? 그럴 경우 일단 추리의 전제는 거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추리는 옳다. 그런 무인 자동차가 있다면 그것은 로봇일 테니까. 없다면? 그런 로봇이 없는 것일 뿐, 그것이 로봇이라는 추리 자체는 여전히 옳지 않겠는가? 이렇게 추리의 타당성은 판단의 참, 거짓과 어느 정도 구분된다. 그렇다면 추리의 타당성은 도대체 왜 따지는가?

추리가 타당하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자. 그것은 ‘전제들이 모두 참일 경우 결론이 반드시 참인 것’을 의미한다. 이런 타당성의 의미는 판단과 판단들이 연결되어 추리가 된 경우에 이미 알고 있는 참인 판단들(전제들)에서 아직 모르고 있는 판단의 참을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추리의 타당성도 결국 참과 거짓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판단들에 대해서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이미 알고 있는 참인 판단들을 사용해서 ‘아직 모르고 있는 판단들’의 참 거짓을 확인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추리의 타당성이 이런 방법이 된다. 즉 우리가 이미 참인 것을 확인한 판단들만을 전제로 해서 ‘타당한’ 추리를 구성한다면 아직 모르는 어떤 판단이 결론으로 나타나더라도 그 결론의 참은 확실하게 된다. 추리는 도구인 것이다. 추리 소설 속의 셜록 홈즈가 뛰어난 추리를 할 때 그것은 이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자 도구였지 않은가. 어떤 자가 범인인가에 대해 참인 판단을 내리기 위한 도구 말이다.

생각의 구조를 파악했다. 개념들의 벽돌로 판단의 벽을 만들고, 판단의 벽들을 잘 연결해서 추리라는 집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좋은 벽돌, 좋은 벽이 아니라 좋은 집에 관심이 있다. 부동산 투기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어떤 추리가 타당하고 어떤 추리가 부당한지에 대해 분명하고 효과적인 판단 기준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택한 기준은 바로 형식적인 특징이었다. 내용이 아닌 형식 말이다. 지금은 이것이 상당히 일반화되어서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2천 년 전의 학자에게 이렇게 추상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업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즉 여러 가지 추리들 중에서 타당한 추리, 즉 전제가 참인 경우에 결론이 반드시 참임에 틀림없는 추리의 형식이 바로 자신이 “3단 논법”이라고 부르는 형식에 따르는 추리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3단 논법의 여러 가지 형식을 제시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예로 든 3단 논법은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죽음 논변의 3단 논법은 사실상 다음과 같이 표시되어야 한다.


 

모든 □은 ◇이다.
○는 □이다.
그러므로 ○은 ◇이다.


여기서 □, ◇, ○는 모두 일종의 빈 칸이다. 이렇게 모양이 다른 빈 칸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다. 같은 모양의 빈칸에는 같은 것이 들어간다는 것. 다른 모양의 빈칸에는? 같은 것이 들어가도 되고 다른 것이 들어가도 된다.

형식으로 추리의 타당성을 판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에서 우리가 무인 주행 전기 자동차에 대해서 예로 들었던 추리는 이런 방식으로 타당성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전자 없이 도로 주행을 하는 전기차가 있다. 그렇다면 그건 일종의 로봇이다”라는 추리는 방금 본 3단 논법과는 달리 형식이 아니라 내용(혹은 의미)에 의해서 추리되었다. ‘운전자 없이 도로 주행을 하는 전기차’라는 의미에서 ‘로봇’을 끌어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추리에 더 호감을 느낄 것이다. 3단 논법과 같이, 형식에 의존해서 이루어지는 타당한 추리는 너무 기계적이고 삭막해 보이지만, 내용과 의미에 의존하는 추리는 뭔가 더 고급의 추리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장점이 곧 단점이기도 하다. 의미에 의존하는 추리는 그 타당성이 모호하고 애매한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이 “운전자 없이 도로 주행을 하는 전기차도 차에 불과하지, 로봇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까?”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상당히 긴 설득이 있어야 의견일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회사가 망했다. 그렇다면 그 회사 사장은 가난할 것이다”라는 추리는 어떤가? 의미에 따라서 타당해 보이는 추리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가? 우리나라의 많은 회사들이 부도가 나서 망해도 회사 사장이나 회장은 이미 챙겨 놓은 돈으로 망하지 않았던 예가 많이 있다. 금융위기가 닥쳤던 2008년 10월에 서울신문에서는 “회사는 망해도 사장은 망하지 않는다”라는 이 한국식 격언이 미국에서도 통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 예로, 천문학적 공적자금이 투입될 AIG의 전 CEO 마틴 설리번은 560억원의 퇴직금을 챙겨갔고, 팔리거나 망한 메릴린치, 리먼브러더스를 포함한 월가 5대 투자은행 CEO들의 연봉은 무려 1400억원이었다. “회사가 망했다”라는 전제는 참인데, 그 의미에서 추리한 결론 “사장이 가난할 것이다”는 거짓인 것이다. 결국 내용과 의미에 의존하는 추리는 고급의 추리일지 모르지만, 그 타당성 자체가 별로 믿을만 하지 못하다.

이에 반해서 형식적으로 타당한 추리는 타당성의 측면에서 훨씬 더 확실하다. 회사와 사장의 관계에 대한 추리를 추리의 3단 논법으로 만들어 보자. 비교를 위해 구성해 본 두 예는 이렇다.


모든 정치적 능력자는 회사를 망쳐도 가난해지지 않는다.

CEO는 정치적 능력자이다.

그러므로 CEO는 회사를 망쳐도 가난하지 않다.

회사를 망친 모든 사람은 가난해진다.

사장은 회사를 망친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장은 가난해진다.


이 두 추리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의 형식을 정확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왼쪽의 첫 번째 예는 결론이 참이고 오른쪽의 두 번째 예는 결론이 거짓이다. 어!?? 3단 논법의 형식을 따르더라도 결론이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네? 그렇다. 다시 강조하지만, 타당성의 의미는 전제가 모두 참일 때에는 반드시 결론이 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당한 추론에서 전제가 거짓인 경우에는 결론이 거짓일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보면, 왼쪽의 첫째 예의 전제가 모두 참이라고 해 보자. 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를 수 있지만, 아마도 참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렇게 전제가 참일 경우에 결론은 참이 아닐 수가 없다. 오른쪽의 둘째 예는 어떤가? 전제가 (현실적으로) 거짓이다. 하지만 만약 이 전제들이 참이라면, ‘그 때에 한해서는’, 결론이 항상 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추리가 타당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다. 그리고 3단 논법의 형식에 따른다면 그 내용이 무엇이더라도 그렇게 된다. 즉 전제가 참인 경우에는 항상 결론도 참이다. 너무 단순하고 삭막한가? 그럴지 모른다. 기계적인가? 그렇다. 그리고 이 기계적이라는 특징이 장점이다. 길게 보면 이러한 기계적인 추리능력이 발전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편리하게 사용하는 컴퓨터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형식적이고 기계적이라는 점이 아니라, 3단 논법의 형식이 너무 적다는 데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완벽하다고 제시한 3단논법의 형식은 4개에 불과하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AAA-1

      모든 ◇은 □이다. 
      모든 ○은 ◇이다.         
      ∴ 모든 ○은 □이다.      

EAE-1

      모든 ◇는 □가 아니다.     
      모든 ○는 ◇이다.
      ∴ 모든 ○는 □가 아니다.

AII-1                                 

      모든 ◇는 □이다.
      어떤 ○는 ◇이다. 
      ∴ 어떤 ○는 □이다.

EIO-1

      모든 ◇는 □가 아니다.     
      어떤 ○는 ◇이다. 
      ∴ 어떤 ○는 □가 아니다.


이 4개의 완전한 3단논법을 “정언 3단 논법”이라고 하는데, 중세식 명칭으로는 바르바라(Barbara), 켈라렌트(Kelarent), 다리(Darii), 페리오(Ferio)라고 부르며, 이며,  AAA-1, EAE-1, AII-1, EIO-1은 현대식 명칭이다. 위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가지고 예를 들었던 3단 논법은 AII-1(다리)에 해당된다. 이제 3단논법에 대한 지식은 하나에서 네 개로 들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할 많은 문제들을 이런 3단 논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척 보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개수와 형식이 너무 적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쪽에 있는 형식과 오른쪽에 있는 형식은 사실상 “…이다”가 “…아니다”로 바뀐 점이 다를 뿐 같은 형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한 3단논법의 형식에는 새로운 것이 더해지지 못했다. 3단 논법의 이름에 중세식 이름이 있다는 것을 보면, 이런 3단 논법의 형식들은 최소한 천 년 이상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렇다. 이 세상의 학자들이 다들 멍청해서 천 년 동안 3단 논법의 형식들을 더 늘이지 못했을까? 아니다. 결론은, 그만큼 타당한 추론 형식들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여러분도 직접 한번 만들어 보자. 전제가 참이기만 하면 결론은 반드시 참이라는 것이 보장되는 추론 형식을. 아마, 별 달리 찾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약 2천 년 동안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부울(George Boole)이라는 수학자가 나타나서 타당한 추론형식을 자유자재로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명제논리의 내용이다. 물론, 부울뿐만이 아니라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인 프레게(G. Frege)와 같은 학자들이 1차술어 논리라는 것을 만들어서 명제논리보다 더 복잡하고 강력한 논리학을 만들었다는 것도 ‘학자적인 관점’에서는 중요하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그 내용까지 설명하면, 이 책의 곁가지인 이 내용이 너무 커질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은 생략하겠다. 일단 여러분은 철학사적인 흐름 속에서 명제논리가 만들어진 맥락과 그 가치만 이해하면 된다.

명제논리의 발전은 일반인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만한 ‘단순한’ 사고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그리고 사실은 이것이 어려운 부분이다. 다음의 두 문장을 비교해 보자.

“철수는 진희를 사랑하지 않고, 진희는 철수를 사랑한다.”

“철수는 진희를 사랑하지 않지만 진희는 철수를 사랑한다”

차이점은 밑줄 친 부분이다. 첫 번째 문장이 어떤 경우에 참인지는 알기 쉽다. 철수는 진희를 사랑하지 않고, 진희는 철수를 사랑하는 경우에 참이다. 그럼 둘째 문장이 참일 경우에 대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한가? 부울과 같은 논리학자들은 두 문장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왜? 첫째 문장과 둘째 문장의 차이는 철수와 진희의 사랑관계를 바라보는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입장 차이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주관적인 것이다. 둘째 문장을 말하는 사람은 첫째 문장을 말하는 사람과 똑같은 것을 안다. 다만 철수가 진희를 사랑하는 것과 진희가 철수를 사랑하는 것 중 하나는 좋게 생각하지만 다른 하나는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 주관적인 차이 외에는 없다. 두 문장이 말하는 객관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이 차이를 무시하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만 현대 논리학으로 들어올 수 있다.

단순한 사고는 여러 측면에서 강조되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학문의 세계, 철학의 세계에서도 그러하고 동서양이 모두 그러하다. 예를 들어, ‘진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혹시 영원불변하는 우주의 원리같은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가? 서양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란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어떠한가? 공자는 "자로"라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로야, 너에게 앎을 가르쳐 주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앎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내용, 황당무계하고 많은 것을 포함하는 어떤 것이 진리이고 지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세상에서 유명한 현자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복잡한 생각 안에 있는 것은 오히려 문제이다. 복잡한 생각 안에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킨 관념들을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복잡한 것 안에서 해결할 수는 없다. 복잡하기 때문에 해결이 어려운 것이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하나씩 풀어내야 한다. 그리고 단순하게 풀어내어 옳고 그름을 하나씩 따져 나가야 한다. 그렇게 계속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결국 해결의 열쇠는 단순한 것에 있다.

 

 

 

 

 

<철학, 지식이 아닌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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