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의 양상실재론에 대한 Chihara의 비판


 

Charles S. Chihara의 책,
The worlds of Possibility 제3장의 앞부분, "양상 실재론" 부분 번역입니다.
물론 초벌 번역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무리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내용은 루이스의 양상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분야는 양상 논리 및 양상 형이상학에 관한 부분이죠.

책: The worlds of Possibility: Modal Realism and the Semantics of Modal Logic
저자: Charles S. Chihara.
Clarendon Press. Oxford.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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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 논리에서 연구된 모형들은 집합 이론적 구조들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양상 논리의 모형 이론을 집합론의 일부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제기되는 철학적 물음은 다음과 같다. 모형이론에서 연구된 집합론적 구조와, 양상 논리의 원리와 추론들에 대해 이러한 구조에 대한 연구가 어떤 통찰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것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 한 대답이 양상 실재론일 수 있다.


1. 루이스의 양상 실재론

양상 실재론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 이외에 다른 가능세계들이 존재한다. 완전히 개화된 의미(full Blown sense)에서의 양상 실재론은, 그 다른 가능세계들이 단순히 추상화나 기술들이 아니라 우리 세계의 존재와 같은 방식으로 실재한다는 주장이다. 양상 실재론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존재하는 많은 세계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양상 실재론은 존재론적 입론이다. 이것은 루이스가 그런 가능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믿을지라도, 우리가 그러한 가능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라는 인식론적인 입론이 아니다.
루이스가 다른 가능세계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은유적이거나 시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곧이 곧대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가능세계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들과 같으며, 단지 그 대부분이 행성들보다 훨씬 크고 그것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란 점만이 다르다”라고 말한다. 가능세계들이 떨어져 있지 않은 이유는, 그것들이 전적으로 시공간적으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들 간에는 어떤 시공간적 관계들도 없다”라고 말한다.

<현실성에 대한 색인어적 분석>

시공간적으로 고립된 다른 가능세계들이 있다. 아마도 그 중 하나만이 현실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세계를 다른 가능세계들로부터 구별해 주는가? 혹은 단지 가능한 세계들이 결여한 무엇을 현실세계가 가지고 있는 것인가?
루이스의 답변은 단순핟. ‘현실적’(actual)의 의미는 화자가 누구인가에 의존한다. 화자가 a라면 ‘현실세계’는 a가 존재하는 그 세계만을 가리킨다. 이 교리를 ‘현실성의 색인적 분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현실적’이 색인적 용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나’, ‘이것’, ‘여기’ 등이 색인적이듯이 말이다.
신의 관점에서는 모든 세계들이 동등하다. 물론 우리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세계가 특별하다. 이 세계가 현실적인 것이다.

<세계 속박되어 있는 가능 대상들>

양상 논리의 의미론의 표준적 해석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많은 가능 세계들에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루이스의 의미론적 분석에서는, 각 사람이 모두 ‘세계-속박’되어 있다. 만약 a가 세계 w에 존재하고 u≠w이면, a는 u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양상 실재론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옳다. 모든 가능 세계들이 존재하고 내가 그 중 하나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내가 다른 세계에 있을 수 있겠는가?

<상대역 이론>

“험프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수도 있었다”가 참인 경우 오직 그 경우에 험프리가 대선에서 당선되는 가능 세계가 있다. 하지만 모든 존재자들이 세계에 속박된다고 주장하는 루이스는 어떻게 이와 같은 문장의 참을 허용할 수 있는가? 루이스의 양상성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이의 문장이 참인 경우 오직 그 경우에 대선에서 당선되는 험프리의 상대역이 존재하는 가능 세계가 있다.
험프리의 상대역은 무엇인가? 세계 w에서의 험프리의 상대역은 험프리를 닮았지만, 험프리는 아니다. 험프리의 상대역은 세계 w에 있는 어떤 다른 것보다도 험프리를 닮았다. 하지만 이 험프리의 상대역이 어떻게 흠프리가 하는 것을 표상하는가? 군 장교는 전투를 표상하기 위해서 군인들, 탱크, 트럭들, 대포들의 작은 모형들을 사용한다. 유사하게 가능 세계는 험프리를 표상하기 위한 실제로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을 가질 수 있다.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세계들은 가능성들을 표상한다. 그리고 세계들은 적절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럴 수 있다. 그 부분들은 우리 세계의 것들과 유사한 것들이다.
상대역 관계는 통세계적 동일성에 대한 루이스의 대치물이다. 그것은 동일성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유사성 관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간계가 동치 관계라고 가정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상대역 관계는 대칭적이지 않고 추이적이지도 않다. 또한 사물들은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다른 점들에서는 비슷하지 않다. 우리가 중요시 하는 어떤 유사성의 측면 때문에 어떤 유사성 관계는 다른 유사성 관계와 다를 수도 있다. 더욱이, 비교의 측면에서 같다고 하더라도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엄격해서 두 유사성 관계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상대역 관계가 허용된다면 그 중에서 특정 양상 진술과 관련된 상대역 관계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루이스에 따르면 이것은 맥락적 요소에 기반하여 결정된다.
치하라의 의심: 무한정한 상대역 관계가 허용된다면 양상 진술을 하는데 있어 어떤 것이 유관한 상대역 관계인지를 어떻게 결정하여 대화가 성공적일 수 있는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세계에 대한 부분전체론적 설명

루이스의 부분전체론적 용어법에서는, 험프리는 현실 세계에 있다고 말해지지 않는다. 그는 현실 세계의 부분이라고 말해진다. ‘-의 부분’이라는 관계는 루이스의 존재론의 기본 관계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부분전체론은 이 이론의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가능세계의 어던 부분도 “가능한 개별자”이고 두 개의 것이 동일한 세계의 부분들이면 그것들은 “세계 동료들”이다. 가능세계는 그 세계의 부분들인 가능 개체들의 부분전체론적 합이다. 그것은 최대 합인데, 왜냐하면 한 세계의 어떤 부분의 세계 동료도 그 세계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시공간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세계의 두 부분들이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학 소설에서, 두개의 분리된 ‘우주들’ 알파와 베타가 때때로 독립적인 시공간에서 존재한다고 묘사된다. C.D.브로드가 몇 년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서로 시공간적으로 고립된 그런 “우주들”이 세계의 부분들로서 왜 있을 수 없는가? 루이스는 그러한 가능성을 인정하고 싶어지지만, 그는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 밖에 없다고 느낀다.

단일한 세계 내에서의 단절된 시공간에 대해 증거없는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과 세계 동료 관계를 원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 사이의 선택이 주어진다면 나는 전자가 더 신뢰할만하다고 생각한다.(루이스 1986: 72)

이 인용 구문에 대해서 많은 독자들이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루이스는 세계 동료 관계를 원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반직관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많은 논평자들이 이것을 지적으로 일탈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다른 원초적 관계를 선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모든 이론이 어떤 원초적 용어들을 가지고 있다. 모든 용어들이 정의될 수는 없다. 세계 동료 관계를 원초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 그럴듯하지 않는가? 루이스는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 대한 그의 동기에 대한 최소한의 부분이 다음의 사실에서 발견된다. 즉, 가능세계들을 상정하고 믿는 것에 대한 그의 정당화는 그의 상정이 “전체 이론”의 다양한 원초어들로의 환원을 결과한다는 주장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서, 그가 형이상학적 불가능성이나 개념적 불가능성을 단순히 방법론적 원리로부터 추론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을 진척시키는 것은 이상한 방법으로 보인다. 그러한 방법론적 원리로부터 수학적 불가능성을 추론할 수학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정당화에 대해서 나중에 더 언급할 것이다. 당장은, 나는 단지 루이스의 “세계 동료성”의 기준이 매우 이상한 가정에 의존한다는, 그리고 그로부터 반직관적인 교리가 생겨난다는 의심스러운 사실만을 언급하겠다. 예를 들어서, Craig Bach가 나에게 지적했듯이, 루이스 입장에서는 다음의 진술이 거짓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x와 시공간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거짓인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당신이 시공간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은 있을 수 있다. 나는 또한 단절된 시공간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루이스가 제시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루이스는 우리의 양상 개념들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는가?

나는 양상에 대한 그의 실재론적 설명에 대해서 루이스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지금 검토하려 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바로부터, 루이스가 우리들에게 급진적으로 새로운 양상 개념들을 채택하도록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 가능하며, 이러한 양상 개념들은 철학자들이 활용하는 개략적으로 특성화된 선분석적 양상 개념들을 대체할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코인에 따르면, 바이에르스트라와 다른 19세기 분석자들이 극한과 연속에 한 입실론-델타 개념들을 개발한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물음을 탐구하기 위해서, 나는, 양상 논리의 어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원리들의 본성에 양상 논리의 모형 이론이 어떻게 빛을 던지는지에 대한 루이스의 설명(루이스, 1986)으로 가 보자. 루이스는 양상 논리의 의미론을 관계적 프레임과 이러한 프레임들에 대한 값부여들의 관점에서 특성화하는 데 표준적인 관행을 따른다. 그리고는 그는, “현실적인 것은 무엇이든 필연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참인가?”와 같은 좌절시키는 질문들에 대답하려 하는 대신에, 우리는 관계적 틀에 대한 일반적 물음들을 우리가 탐구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한 답변들은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양상 원리들의 진리값을 역시 결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결과를 적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관계적 틀들을 양상 원리들에 관련시키는 양상에 대한 어떤 분석들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루이스는 양상 연산자들이 가능 세계들에 대한 양화사들이라는 그의 믿음을 명백하게 선언하며, 그러한 메타논리학적 결과들이 적용가능한데, 그 까닭은 “양상 연산자들에 대한 정확한 해석들을 할 수 있는 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루이스는 우리의 개략적으로 특성화된 선분석적 양상 개념들을 그의 실재론적 가능 세계들 개념들로 대치하도록 호소하는 것은 아님이 매우 분명하다. 아니다. 그는 스스로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양상 연산자들에 대한 “정확한 해석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메타논리적 결과들이 적용가능한 까닭이다.
루이스의 이론을 우리의 양상 개념들(과 특히, 양상 연산자들)에 대한 가능세계 분석을 선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루이스 1986년의 한 논점에서 그는 “우리는 dfl가 실제로 견지하는 양상적 견해들을 어떻게 얻게 되는가?”라는 물음을 논의한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우리의 매일의 양상 견해들은, 대규모적으로, 재조합의 원리의 귀결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에게는 루이스가 그의 가능 세계 설명을 우리의 양상 개념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으로서 제시하는 것으로서 간주하고 있다는 추가적인 증거가 주어진다. 왜냐하면 그의 재조합의 원리는 다르 stprP들의 존재가 주어지면 특정 종류의 가능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양상 개념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그가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세계들엗 o한 그러한 원리의 귀결로서 일상적인 양상적 으견들에 일반 사람들이 도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루이스의 가능자론

플란틴가가 현실론자라는 것,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견해와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 있을 수는 없었다는 견해 양자를 견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1장에서 지직되었다. 위에서 주어진 명시화로부터 루이스는 플란틴가의 현실론자의 특징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이스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있다. 즉 존재하지만 우리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 그런 정도까지는, 루이스는 가능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다. 가능주의자는, 상황을 바라보는 이러한 방식에 따라서,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있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있을 수 있었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이다.


2. 루이스의 양상성 분석은 옳은가?

나는 루이스의 양상성 분석이 옳은가에 대한 시초적인 의문을 제시하려 한다. 다음의 고찰들은 결정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논점에서는, 내가 앞의 두 장들에서 논의한 양상 개념들이 루이스에 의해서 정확하게 분서고디지는 않은 것 같다는 작은 의심을 제기하고자 할 뿐이다.
첫 번째로, 세계들에 대한 루이스의 존재론과 양상 연산자들에 대한 그의 분석 간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 양상 연산자들 덕분에 앞에서의 믿음이 후자를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다른 철학자들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를 루이스#라고 부르자. 그는 David Lewis만큼이나 많은 세계 존재론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루이스#가 양상 연산자에 대한 루이스의 분석을 확신하지 못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특히 그는, 루이스의 가능 세계들 분석이 앞 장들에서 논의된 거칠게 특성화된 선분석적 개념들을 적절하게 포착한다는 가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루이스#은 루이스의 방식대로 양상 연산자들을 분석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장점이 있음을 인정한다. 특히 두 사람은 이러한 많은 세계들이 존재한다고 동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이스#은 다른 세계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루이스#에게는 다른 세계들 각각의 존재는 그 자신이 거주하는 세계의 부분들의 존재만큼이나 우연적인 문제로서만 보인다. 그가 간주하듯이, 이러한 다른 세계들은 모두 하나의 실재의 모든 부분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현실 세계가 소유하는 모든 부분들의 것과 같은 우연성을 공유한다. 다른 세계들에서 루이스#는, 우리가 고찰하게 되는 아주 많은 명제들 에 대해서, 가 (대략적으로 특성화된, 선분석적 의미에서) 필연적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이 용어에 대한 루이스의 분석에 따라서.) 하지만 루이스는 다른 세계들 각각의 존재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루이스#는, 그 자신은 우연적이라고 (대략적으로 특성화된 의미에서) 믿는 어떤 명제들이 있음을 믿지만, 이 명제들에 대해서 루이스는 필연적이라고(그 용어에 대한 그의 분석에 따라서) 믿는다. 이로 인해서 루이스#는 ‘필연적으로’라는 용어의 개략적으로 특성화된 의미를 루이스의 분석은 완전하게 포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3. 가능세계들에 대한 루이스의 정당화

David Lewis는 왜 가능세계들을 믿는가? 첫 번째로, 루이스가 수학적 실재론자라는 것이 지적되어야 하며, 여기서 ‘수학적 실재론’이라는 것은 숫자와 집합들과 같은 수학적 대상들이 존재한다라는 교설로 정의된다. 수학적 대상들은 일반적으로, 물리적 시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는, 인과적으로 접근불가능하며 빗물리적인 대상들로 간주된다. (루이스의 버전은, 수학적 대상들의 지이에 대해서 불가지론적이라고 간주되는 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입장과는 다르다.) 수학적 실재론이,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탁자들과 의자들과 같은 일상적 대상들에 대한 상식적 의미에서의 믿음을 상회하는 존재론적 관점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가능 세계들을 믿는 루이스의 이유들은 수학적 실재론자가 되기 위한 그의 이유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수학적 대상들의 존재에 대한 루이스의 입장을 고찰해 보자. 집합론적 우주가 수학자들의 낙원이라는 힐버트의 잘 알려진 진술에 동의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기서 루이스가 논변하는 바는,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환원공리를 정당화하고자 시도한 “수학 원리”에까지 소급되는 추론의 노선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들은, 공리들은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 수학적 진술들, 그 공리가 없이는 증명될 수 없는 진술들에 대한 연역을 허용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환원가능성 공리가 어떤 의미에서 “수학을 위해서 필연적이기 때문에” 믿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괴델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수학적 대상들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노선의 추론을 한단계 더 밀고 나간다.

- 그러한 대상들에 대한 가정들은 물리적 강체들에 대한 가정들만큼이나 적법하며, 그것들의 존재를 믿을 그만큼의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리적 강체들이 우리의 감각 지각들에 대한 만족스러운 이론을 위해서 필연적이듯이 그것들은 동일한 의미에서 수학의 만족스러운 체계를 얻기 위해서 필연적이다. (괴델 1964a: 220)

그 다음에, 수학적 대상의 존재에 대해서 ‘불가피성 논변’으로 알려지게된 것을 개진함으로써 콰인이 그 다음에 온다. 콰인에게 있어서, 수학적 대상들에 대한 가정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최선의 이론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즉 우리의 현존하는 과학 이론들의 빛에 의해서 가장 잘 정당화되는 것이다. 현대 수학은 현대 물리학의 핵심적인 부분이고 수학은 수학적 대상들의 존재에 존재론적으로 부담을 진다. 따라서, 우리가 물리학의 최선의 이론에 의해서 함축되는 것을 믿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그만큼 수학적 대상들의 존재를 믿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러한 노선의 논변은 루이스에 의해서 새로운 수준으로 제시되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수학적 대상들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유사한 방식으로 다른 세계들에 대한 믿음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고는 다른 세계들의 존재에 대한 루이스의 논변으로 틀림없이 이어진다. 그는 다음의 입장을 지지한다. 집합의 존재론이 수학자들을 위한 낙원이듯이, 가능세계들의 존재론이 철학자들의 낙원이다. 우리가 가능세계들을 믿기만 하면, 이론 구성의 철학자들의 과제는 훨씬 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전체 이론은 양상 믿음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가능 세계들의 가정으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세계들에 대한 양화로서 양상성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가능성은, 이러한 분석에서, “세계들에 대한 존재 양화에 필적한다”. 더 구체적으로, ‘◇P’가 이러한 분석에 따라서 참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P’가 w에서 참인 그런 가능세계 w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분석은 양상 논리에서의 결실많은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 결실은, 우리가 원초적 개념으로서 ‘◇'와 ’□'를 정의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이다. 이러한 결실많음은 이 분석을 지지한다.
루이스는 가능세계들이 양상 논리의 영역에서만 유용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설명된 유익함의 종류는 철학의 다른 영역에까지 확장된다. 예를 들면, 속성들은 가능세계들의 용어로 정의될 수 있다. 속성들은 사물들의 집합들일 뿐이다. 직관적으로 말해서, 속성 F는 속성 F를 가진 모든 사물들(현실적이든 가능하든)의 집합으로 간주된다. 명제들은 가능세계들의 속성들로 간주되고, 따라서 속성들은 가능세계들의 집합으로 간주된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명제 p는 p가 참인 모든 세계들의 집합일 뿐이다. 따라서, 부분전체론과 집합론으로부터 원초적 개념들을 시작함으로써, 그리고 가능세계들의 개념을 추가함으로서, 다른 기본 개념들의 상당한 숫자가 이러한 원초어들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전체 이론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원초어들의 다양성을 우리는 줄일 수 있다. 이것이 가능세계들이 유용한 이유이다. 따라서 루이스는 결론짓기를, 양상 실재론은 성과가 많다. 이로 인해 우리는 그것이 참이라고 믿을 좋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위 논변의 결론은 매우 환상적이어서, 그 추론이 완전히 엄격하고 많은 철학자들의 동의를 획득할 진정한 기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강요될 때에만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별로 놀라운 바가 아니듯이, 루이스의 입장은 많은 반론에 부딪혔다. 다음 절에서 나는 이러한 반론들 중에서 더 충격적인 두 가지를 제시할 것이다. 이 반론들은 많은 수의 철학자들이 제시한 것이며, 이들에게 루이스는 힘있고 설득력있는 방식으로 답변했다. 다음에서, 이러한 반론들에 대한 루이스의 반응을 평가하는 데 특별히 집중할 것이다.


4. 루이스의 양상 실재론에 대한 두 반론

양상성과의 무관성으로부터의 반론

피터 반 인와겐이 이러한 반론들 중의 첫째 것을 표현했다. “양상 무관성 반론”이라고 한다. 그는 루이스가 가능세계들이 양상성과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한다고 제시했다. 마이클 쥬비엔은 이 반론을 특히 생생한 형태로 제시했다.

잠시 동안, 우리가 루이스의 정신에 따라서, ‘세계’가 어떤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의미에서 우리에게 ‘시공간적으로(혹은 인과적으로) 연관된’ 것만을 포괄한다고 가정하자. ‘세계’는 그러면, ‘현실 세계’라고 그가 부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세계와 닮았지만, 그 시공간적 한계 바깥에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라고 상상하는 것이 의미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록 거의 의무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세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것들과 닮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왜 우리 세계가 그러했을 수 있는 ‘어떤’ 방식에 대해서, 그런 방식으로 있는 이와 같은 특별한 종류의 것이 있다고 가정해야만 하는가? 결국, 우리는 이러한 특별한 것들이나 ‘추상적인’ 것들을 우리의 양상적 논의로부터 창조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가, 그것이 어떨 수 있었든 간에, 존재한 방식에 유사한 방식들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거기에 있으며, 전적으로 우리와 독립적으로 말이다. 그것들이 가능성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Jubien 1988: 305)

이러한 종류의 반론에 대한 루이스의 반응은 황당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전혀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은 내가 이러한 것들[이 가능 세계들]이 양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대해서 많이 설명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양상 연산자들이 그것들에 대한 양화사들이라고 말했다.”(루이스 1979b:98)
이것은 황당한 반응이다. 루이스는 반 인와겐이, 루이스 자신이 양상 연산자들을 세계들에 대한 양화사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알고 있음을 깨달아야만 한다. 따라서 루이스가, 반 인와겐이 이러한 세계들이 양상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을 때 그는 “양상 연산자들이 세계들에 대한 양화사이다”라는 말에 으해서 답해질 수 있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추론해야만 합당할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 나는 이 황당한 반응으로 간단히 되돌아 올 것이다. 지금은 두 번째 반론을 고찰하도록 하자.

불가지성으로부터의 반론

“불가지성의 반론”이라고 불리는 이 반론은 Tom Richards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가능세계 의미론들이 가능성 진술들에 대한 진리조건을 산출할지라도, … 그 진리조건들은, 어떤 주어진 진술에 대해서 그것들이 일치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그런 조건들이므로, 따라서 그 진술이 참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루이스는 이 반론을 말바꾸기를 해서 다음과 같이 읽는다. “만약 양상 실재론이 우리가 (어떤 양상 명제를 믿음으로써) 알고 있는 것의 내용에 대한 바름 설명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결코 가능적으로 알려질 수 없을 것이다.”
이 반론을 반박하는 루이스의 전략은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에 대한 흄의 비판을 무너뜨리는 칸트의 방법을 모방한 것이다. 흄이 선험적으로 확실한 구문론적 진리를 알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반대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흄에게, 구문론적 명제들은 감각 경험에 근거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만약 어떤 명제가 선험적으로 참으로 알려진다면 그것은 분석적 참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흄의 분석에 따르면 알려질 수 있는 분석적 참은 수학과 논리학의 것들 뿐이다. 따라서 흄은 탐구에서 결론짓는다.

위의 문단에 의해서 교설적 잠에서 깨어나서, 칸트는 “미래 형이상학에 대한 서언”에서 다음과 같이 논변한다. 수학의 진리들은 구문론적이며, 흄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분석적이지 않다. 이러한 방식으로, 칸트는 수학이 구문론적 진리들에 대한 선험적 지식을 산출하는 과학으로서 형이상학으로 분류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만약 흄이, 수학이 구문론적 진리들에 대한 선험적 지식을 산출한다는 것을 보았다면, “형이상학이 통합되었을 훌륭한 회사는 모역적인 잘못된 취급의 위험으로부터 수학을 구제했을 텐데, 왜냐하면 형이상학에 대한 공격은 수학에까지 도달했을 것임에 틀림없고, 이것은 흄의 의도가 아니고 그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칸트는 제안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루이스는 불가지성 논변에 대해서 반박하며, 그는 수학적 지식을 “우리가 우리로부터 인과적으로 고립된, 그리고 우리가 조사할 수 없는 수많은 대상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그런 사례로 밀어붙인다. (루이스 1986: 109) 가능 세계들에 대한 지식을 수학적 지식의 훌륭한 회사에 넣음으로써, 그는 양상에 대한 그의 분석을 모욕적인 잘못된 취급으로부터 구제하고자 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지식에 대한 인과적 설명은 그 나름의 자리에서 잘 있지만, 그것들이 일반 이론으로서 추구된다면, 수학은 그것들을 거부할 것이다.”(루이스 1986:109)
수학이 우리에게 인과적으로 고립된 대상들에 대한 지식을 준다는 그의 주장을 루이스는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루이스에 대한 앞에서의 인용은 왜 그가 집합의 존재에 대한 가정이 왜 정당화되는가를 알려준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적 믿음을 확장하여 집합을 포함시키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이론적 통일성과 경제성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론적 통일성을 위해서 우리의 존재적 믿음들을 확장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 참을 믿게 된다면 우리는 지식을 얻게 된다” 루이스에 따르면 이것이 우리가 집합에 대한 지식을 얻는 방식이며, 그 집합은 인과적으로 접근불가능한 대상들이다.
이와 같이 인과적으로 접근불가능한 대상들에 대한 지식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나서, 루이스는 가능세계들과 같은, 다른 인과적으로 접근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존재와 그 내용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에 제거할 수 없는 어떤 장애물도 보지 못한다. 진정으로, 우리는 루이스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추론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Richards와 불가지성 반론의 지지자들이 다른 세계들에 대한 어떤 지식도 우리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그들이 인과적으로 접근불가능한 대상들에 대한 어떤 지식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집합들에 대한 하지만 수학적 지식은 이러한 가정을 거부한다. 집합들은 인과적으로 접근불가능하며, 하지만 우리는 집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브라이언 스컴스는 불가지성의 논변을 지지하면서, 만약 가능 세계들이 우리의 현실 세계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가정된다면 그러한 세계들에 대해서 알기 위한 어떤 주장도, 실재하는 것에 대한 물리적 구성요소들에 대해서 우리가 안다는 주장에 대해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증거에 의해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이스의 대답은 이렇다. 당나귀가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당나귀와의 인과적 대면을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말하는 당나귀가 있는 가능 세계가 있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가능 세계들에 대한 인과적 대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차이는 이것임에 틀림없다. 전자는 우연적으로 참인 지식인데 반해서 후자는 필연적 진리에 대한 지식이다. 당나귀가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에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연적인 참이다. 당나귀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환경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당나귀가 말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단지 당나귀가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즉 필연적 참-과 그것을 아는 것이라고 루이스는 믿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과 환경을 살펴보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여기서 다시, 수수께끼가 주어진다. 한편으로는 스컴스의 입장이 완벽히 합당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루이스의 반응이, 전혀 논리가 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 엽기적이고 괴이하게 느껴진다.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


5. 지식에 대한 루이스의 견해에 대한 비판

위의 반론들에 대한 루이스의 답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루이스의 방어의 많은 부분은 수학적 지식에 대한 그의 분석에 의거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서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결과적으로 전체 이론의 원초어들과 공리들의 다양성을 환원할 수 있기 때문에 집합들의 존재를 가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루이스의 추론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자신이 이러한 회의론에 대해서 답변할 수 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아마도, 이론적 장점들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존재론을 받아들인다는 그 생각은 잘못 인도된 것인지도 모른다라고 회의적 인식론자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 나는 어떠한 회의론적 인식론의 가정보다도 수학이 더 잘 알려져 있다고 답변하고자 한다.

물론, 수학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어떤 인식론적 이론보다도 더 확실하다. 하지만 존재론에 대한 루이스의 입장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수학의 거짓을 가정하든지 아니면 수학의 진리에 의문을 제기해야만 하는가? 여기서 언급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회의적 의문들이 수학과 상충함에 틀림없다는 것에 대해서 그는 어더한 증명이나 설득력있는 논변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그것을 단언할 뿐이다. 루이스가 그의 급진적인 존재론적 주장들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들이 수학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이런 방식이다. 하지만 사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수학이 아니라 단지 수학적 정리들에 대한 루이스의 해석이며, 또 집합들의 존재를 믿도록 지지하는 것에 대한 그의 추론이다. 내가 수학적 실재론자들과 수학적 개체들의 존재에 회의적인 사람들 간의 논쟁을 볼 때, 그것은 수학의 정리와 어떤 철학적 주제들 간의 갈등은 아니다. 루이스와 같은 방식으로 이 논쟁을 보자면, 우리는 수학의 언어와 진리에 대한 상당한 철학적 분석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 세계들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에 대한 루이스의 주장에 대한 나의 의문들은 수학적 지식에 대한 그의 주장들 이상에까지 나아간다. 우리가 비록 집합들의 존재와 속성들에 대해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가능 세계들에서 나와 매우 비슷한 어떤 사람이 강의를 하고 있는, 우리 세계와 매우 유사한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가능적으로 알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스컴스의 노선을 따라서, 그러한 다른 세계들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인지적 능력을 완전히 상회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방금 언급된 종류에 대한 의심들에 대해서 일종의 답변을 가지고 있다. 불가지성 반론에 대한 응답에서 그는 인식론적 입론을 발전시켰으며, 그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이론적 통일성을 위해서 존재적 믿음들을 확장시킨 결과로서 그 진리를 믿게 된다면 그럼으로써 우리는 지식을 얻는다는 것임을 기억해 보자. 이것은 애초에 수학적 대상들에 대한 지식을 우리가 어떻게 얻는가에 대한 설명으로서 개진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수학자들과 같은 종류의 지식을 같이 얻을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와 인과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우리가 조사할 수 없는 수많은 대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가지성 논변에 의해서 가정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세계들이 우리로부터 인과적으로 단절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세계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루이스의 인식론적 원리들은 우리가 이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입론들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이론적 통일성을 위해서 가능세계들을 상정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상정들이 참일 수 있다면(즉, 그러한 세계들이 진실로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다른 세계들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지칭의 목적을 위해서 이러한 인식론적 테제에 “이론적 통일성 테제”라고 이름을 붙이자.
나는 루이스가 ‘안다’라는 용어와 그와 관련된 표현들에 대한 우리의 사용에 대해서 완전한 탐구를 한 결과로서 그의 이론적 통일성 테제에 도달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루이스가 이 테제를 받아들인 것이, 우리가 집합들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불가지성 반론에 대한 그의 가능성 분석을 옹호하고자 하는 다른 설득력있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의심하는 바이다.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루이스가 그의 인식론적 테제를 받아들이기 위한 정당화나 토대들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것을 단언할 뿐이다.
이테지들이 지식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개념을 포함하는 심각한 인식론적 테제로서 개진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루이스의 테제는 지식에 대한 ‘정당화된 참인 믿음’ 설명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에 주목하자. 그에 따르면 S가 φ라는 것을 알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S가 φ를 믿고, φ가 참이며, S가 φ임을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이 설명에서의 세 번째 조건을, S가 이론적 통일성을 위해서 φ를 받아들였으며 우리가 본질적으로, 루이스의 이론적 통일성 테제를 얻는다라는 루이스의 조건과 대치해 보자. 물론 정당화된 참인 믿은 설명은 인식론자들이 때때로 ‘게티어 사례들’이라고 부르는 것과 충돌하며, 그래서 루이스의 테제에 어떤 의심을 던질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그러한 예들을 탐구해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위 문단의 논점을 확립함에 있어서, 나는 루이스가 지식에 대한 그의 설명과 정당화된 참인 믿음 설명 간의 유사성이나, 혹은 그 설명에 제기된 많은 문제점들을 알고있지 않다고 가정하고자 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게티어 유형의 문제들이 ‘2+2=4’와 ‘어떤 모순도 참이 아니다’에 의해서 표현되는 진술들과 같은 ‘단순히 비우연적인 문제들’의 경우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가 제안하는 문단들이 루이스 1986에 있다. 비록 이러한 진술들이 guru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그것을 믿는다 할지라도, 루이스는, 그 사람이 2+2=4와 어떤 모순도 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논변을 위해서 루이스의 지식에 대한 설명이 게티어 유형의 문제들에 의해서 단순히 비우연적 문제들의 경우에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른 세계들에 대한 우리의 가정된 지식에 관심을 갖질 때에는 그러한 문제들로부터 그의 인식론적 입장을 방어하지 못할 것이다. 2+2=4라는 것을 안다는 주장과 다른 가능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는 주장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이 단지 어떤 guru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다른 가능 세계들이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면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식이 되지 못할까? 확실히 그러하다. 어떤 인식론자들이, 그의 믿음이 그러한 형편없는 토대에 기초하고 있을 때 다른 세계들에 대한 지식을 진정으로 가지고 있다고 인정할 것인가?
그렇다면 루이스의 이론적 통일성 테제의 합당성을, 게티어 유형 사례들에 대한 여러 문헌들의 관점에서 탐구해 보자. 다음의 예에서 시작해 보자. 셜락이 어두운 밤에 들판에서 버틀러를 만나려고 한다. 그는 버틀러의 키큰 형태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다. 갑자기 그 사람이 그의 손을 들고 총을 그에게 겨눈다. 총 소리가 난다. 셜락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 그는 버틀러가 달아나는 것을 본다. 셜락은 심각하게 다치지 않았지만 그는 그 사람이 떨어뜨린 권총을 발견할 때 최초로 어리둥절하게 되고 그는 오직 하나의 원이 발사되었다는 것을 본다. 셜락은 그가 한번이 아니라 두 번의 총소리를 들었다고 확신한다. 그는 그리고는 그의 존재적 믿음을 이론적 통일성을 위해서 확장한다. 즉 그는 그가 본 것과 그가 들은 것을 조화시키기 위한 합당한 유일한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은 담장 뒤에 숨어있던 다른 총잡이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사실, 사악한 모라이어티 박사가 담장 뒤에 숨어 있었고 그가 셜락을 쏜 총을 발사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모라이어티의 총은 소음기를 달고 있었고, 그래서 오직 한발의 총성만 들릴 수 있었다. 셜락은 그날 저녁에 아편을 너무 많이 맞았고, 그래서 버틀러의 총 소리가 그의 마음에 그가 두 발의 총성을 들었다는 인상을 일으켰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경우에 우리는 셜락이 다른 총잡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해야 할까?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는 다른 총잡이가 있다고 믿었고, 재수 좋게도 그의 믿음은 참인 것이었다. 나의 생각에는 이것은 지식의 사례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 그 행위자의 존재적 믿음들이 위의 사례들에서 행해진 것보다 더 실질적인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 사례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그는, 만약 한 행위자의 존재적 믿음들이 그 행위자가 이미 믿지는 않았던 종류의 존재자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도록 확장된다면, 그리고 이 확장이 이론적 통일성을 위해서 이루어지고, 또한 그 행위자의 새로운 존재적 믿음이 참인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렇다면 그 행위자는 이 새로운 종류의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라고 하는 방식으로 그의 이론적 통일성 테제를 구체화할지 모른다. 위의 사례는 이러한 분석에 의문을 던지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셜락이 그가 이미 믿지 않았던 종류의 존재자의 존재를 믿게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버전의 루이스의 테제에 의문을 던지는 사례들을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톰과 수가 같은 방을 쓰는 물리학의 대학원 학생들이라고 하자. 어느 날 수가 그녀의 허락없이 자신의 일기를 훔쳐읽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에 그녀의 조가 수행해 온 실험의 결과들에 대한 순전히 허구적인 설명을 쓰기 시작했다. 기존의 수용된 이론을 실질적으로 개정하지 않고서 그 실험의 결과들을 설명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은, 자기적 단극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론적 고려들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제안되었지만 실험적으로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유형의 존재자를 상정하는 것이다. 어느날 탐이 수의 일기를 읽고 이론적 통일성을 위해서 단극의 존재를 믿게된다. 이제 실제로 단극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톰이 단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해야 하는가? 다시, 우연히 참인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지식의 사례가 아니다. 따라서 이론적 통일성 테제를 의심할 이유들이 있다.
루이스의 지지자들은 위의 사례들이 그에 대한 문제가 더 이상 되지 않도록 소질하고 수정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그러한 개선이나 수정도 다른 반례들에 여전히 열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지식에 대한 정당화된 참인 믿음 분석에 대한 거대한 문헌들이 이러한 노선의 분석이 그렇게 전망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지는 않는다.
루이스의 인식론적 테제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좋은 이유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불가지성 반론은 나에게는 양상 연산자들에 대한 루이스의 분석에 대한 가공할만한 반론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지구와 유사하지만 다른 행성들을 포함하는 수많은 세계들, 그리고 우리와 매우 유사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런 많은 세계들이 있음을 안다는 주장,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우리가 과학적 연구나 실험들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전체 이론을 위해 필요한 원초적 개념들의 다양성에 대한 환원을 그러한 세계들을 받아들일 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안다는 주장은 나에게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인다. 루이스가 개진하는 종류의 고찰들은 이러한 급진적 믿음들에 대한 워낙 막연한 토대들이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것들을 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루이스의 능력에 대해서 오직 의심할 수 있을 뿐이다.


6. 루이스의 분석에 대한 추가적인 의심들

말하는 당나귀가 있는 가능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라는 루이스의 테제를 고찰해 보자. 루이스가 주장하듯이, “만약 양상적 지식이 내가 말하는 그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는 양상적 지식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와 인과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구체적인 개별자들의 존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루이스 1986: 110)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고자 유혹받는다. 즉 당나귀가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는 어떤 의미가 있다. 이 ‘가능한’의 의미에서는, 말하는 당나귀가 있는 그런 가능세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당나귀가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당나귀가 말하는 가능 세계들이 있다는 것이 따라나오는 그런 ‘가능한’이라는 의미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가능한’에 대한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는 당나귀가 말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지 못한다. 이로부터 이러한 두 의미들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할 좋은 바탕이 생겨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양상 연산자들이 루이스가 분석하는 것과 같이, 처음에서 논의된 개략적으로 설명된 선-가능세계적 종류들의 양상 연산자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들이 있다라는, 2절에서의 제안에 일치한다. 정말로, 양상적 무관성 반론이 의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두 의미들을 동일시하는 것이 적법한가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리처드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왜 한편으로는 당나귀가 말하는 가능성(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에서의)과, 다른 한편으로는 당나귀가 말하는 가능 세계의 존재 간에 어떤 관련성이 있어야만 하는가? 쥬비엔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세계들이 전적으로 서로 구분되는, 독립적인 것들(최소한 물리적으로)이라면, 이것들이 가능성에 대한 단순한 진술의 참이나 거짓에 어떤 연관성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기는 어렵다.”(Jubien 1988: 304)
Matthew Henkin은 동일한 기본 논점을 새로운 방식으로 개진시키고자 했다. 루이스에 따르면 ‘치하라가 오늘 아침에 아침 식사로 달걀을 먹을 수도 있었다’라는 진술의 참은 나와 매우 닮은 어떤 사람이 어떤 적당한 방식으로 오늘 아침에 ‘상응하는’ 어떤 시간에 아침 식사로 달걀을 먹는 그런 세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공간 연속체의 범위 안에-그것은 우리로부터 너무 멀어서 그 둘레에서 나간 어떤 빛의 신호도 은하계의 모든 별들이 사라지기 전에 결코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할 정도인데- 우리의 은하계와 쌍둥이 은하계가 있어서 거기에는 지구와 매우 유사한 행성이 있고, 거기에서 우리와 매우 유사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 중 어떤 사람이 나의 쌍둥이라고 할만큼 나와 매우 닮아서 어떤 적당한 방식으로 오늘 아침에 ‘상응하는’ 시간에 아침 식사로 달걀을 먹는다고 상상해 보자. 이제 헨킨이 묻는다. 이 ‘세계’의 존재는 왜 위의 양상 진술의 참과는 무관한가? 루이스의 세계들-우리의 시공간 안의 어떤 것과도 인과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세계들-은 왜 그리 특별해서 우리의 양상 진술들의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 그런 세계들이 되는가? 달리 말하자면, 누가 루이스의 “세계들”에 그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가?
“양상 연산자들이 가능세계들에 대한 양화사들”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가능성 진술들과 그의 세계들의 존재 간의 연관성을 설명한다는 루이스의 제안은 이러한 반론에 이미 앞서 있는 고려사항들을 지적할 뿐이다. 이러한 반론들에 루이스의 반박이 적절하다고 판단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음의 사례를 고찰해 보자. 바니 베일리는 적문법성(grammaticality)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으며, 그에 따르면 영어 단어들의 열 σ가 문법에 맞는 영어문장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σ가 천사 가브리엘의 상상 속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자. 문법적 무관성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베일리, 당신은 천사 가브리엘의 상상 속에 나타나는 영어 단어들의 열이 적문법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어요”라고 말이다. 루이스가 대답한 방식으로 베일리가 대답한다고 가정하자. 즉 “천사 가브리엘의 상상 속에 나타나는 열어 단어의 열이 적문법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내가 설명했다는 것을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문법적인 열은 천사의 상상 속에 나타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이 응답이 부적당하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것은 도전받고 있는 것, 즉 ‘적문법성’을 베일리가 옹호한 특정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나 해석하는 것이 적합한가 하는 것, 그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그가 한 대답방식에서, 루이스는 도전받고 있는 것이 그가 그것을 분석한 대로의 양상성과 가능 세계들의 존재 간의 논리적 상관성이라고 상정하고 있다. 리처드가 가능성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분명히 그 용어에 대한 루이스의 의미를 마음에 두고 잇는 것이 아니다. 루이스의 의미에 따르면 가능성은 가능 세계들의 존재를 선가정한다. 하지만 루이스가 그 연관성을 이미 설명했다고 답할 때 그는 ‘가능성’에 대한 그 자신만의 의미에서의 용어들을 생각하고 있다.
위 문단에 대한 반응에서, 다음과 같이 반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베일리의 적문법성에 대한 분석은, 양상에 대한 루이스의 분석과 다른데, 그것은 베일리가 천사의 상상 속에 나타나는 것이 적문법성의 의미론과 어떻게 연관된다고 가정되는가에 대한 어떤 자세한 설명도 제공하지 않는 반면에, 루이스는 가능 세계들과 가능성의 의미론들의 사례에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일만한 많은 양상 원리들이 그의 가능 세계 분석에서 도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의 사례의 초점은 불가지성과 양상적 무관성 반론들의 논리를 명쾌하게 만드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반론들에 대한 루이스의 응답이 부적당함을 명쾌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추가적인 상세함을 제공하는 것은 거의 논점이 아니다.
이러한 고찰들은 내가 논의해 온 반론들에 대한 루이스의 황당한 응답에 대한 진단을 지적한다. 양상적 무관성과 스컴스의 반론들은 양상적 진술들에 대한 루이스의 분석을 의문에 몰아넣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 분석이 이미 의문시될 수 없다라는 그런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 반론들에 대해 응답한다. 양상적 무관성 반론에 대한 그의 응답이 세계들이 양상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서 그가 양상 연산자들이 그 세계들에 대한 양화사임을 말함으로써 이미 설명했다는 것임을 기억하자. 하지만 이것은 단지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반대자들은 양상 연산자들이 세계들에 대한 양화로 합당하게 간주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세계들이 양상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박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루이스는 그 반대자들에 대립하는 문제를 단지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가능 세계들이 거기에 있는 실제로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가진, 현실 세계와 같은 진짜 세계들이라면 그것들과 그 내용들에 대해서 안다는 어떤 주장도 우리가 실재의 물리적인 구성요소들에 대해서 안다는 주장에 대해서 요구할 만한 것과 같은 종류의 증거에 의해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스컴스의 반론을 생각하자. 스컴스는 루이스의 양상 분석을 논박하는데, 그는 그러한 다른 세계들의 존재와 내용에 관련된 중요한 가설들을 지지하는 적당한 종류의 어떤 증거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므로, 만약 루이스의 분석이 옳다면 우리는 양상에 대한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불합리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루이스의 대답은 문제시되는 분석을 이미 채택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나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응답에서 그는 단순히, 양상이 세계들에 대한 양화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래서 그는 적당한 종류의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어더어떠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일 뿐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은 쉽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가능성에 근거한 답변을 얻은 것이다. 스컴스의 입장에서는 논점을 선취하는 것이다.
베일리의 예로 돌아와서 불가지성 논변이 제기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만약 당신의 분석이 옳다면, 베일리, 영어 단어의 어떤 열도 문법적으로 옳은지를 우리가 알 수 없을 것이요”라고 말이다. 루이스의 방식으로 대답하는 베일리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당신은, 천사 가브리엘의 상상 속에 나타난 것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인과적으로 접근불가능한 것들엗 o한 사실들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당신이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수학은 그러한 불가능성 논제를 반박합니다. 수학은 인과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어떤 것을 학습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함축하는 어떤 인식론적 이론보다도 더 확실합니다. 무엇이 문법적으로 옳은지에 대한 지식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천사 가브리엘의 상상 속에 무엇이 나타났는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보다도 더 쉽습니다.

나는 이제 그의 급진적 존재론적 논제에 대한 루이스의 정당화를 검토하고자 한다.


7. 수학적 실재론 정당화에 대한 의심들

우리가 왜 집합들의 존재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는가를 설명하는 앞에서의 루이스의 인용문은, 재미있는 수사법을 포함하고 있다. - 마피아는 “상대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대해서 말한다. - 하지만 그러한 수사법과 달리, 이 사례는, 집합론의 표준 버전에서 묘사되는 집합들의 위계구조를 상정하기만 하면, 우리는 전체 이론의 원초어들과 공리들의 다양성을 줄일 수 있으며, 따라서 전체 이론의 전반적인 통일성에 도움이 된다라는 기본 아이디어에까지 내려온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집합들을 상정하는 것은 합리적이게 된다. 여기서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이 생각이다.
루이스가 주장하듯이 집합의 존재 상정이 “전체 이론”의 공리의 수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명확한가? 우리의 “전체 이론”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매우 불명확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답할 수 있는지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만약 우리가 이론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우리가 어떻게 전체 이론의 공리들의 수를 줄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가? 그 밖에도 우리의 전체 이론이 공리들을 가진다고 우리가 왜 가정해야 하는가? 정말로, 전체 이론의 공리는 무엇인가? 우리의 전체 이론은 어떤 종류의 연역적 이론이어야 하는가? 다음 절에서 “우리가 참으로 간주하는 전체”를 바라보는 이 방식에 대해서 물음을 던질 몇 가지 이유들을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상황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우리의 “전체 이론”이 무엇이든 그것이 수학을 포함해야만 할 것이라고 루이스가 응답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수학이 집합론으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그는 우리가 수학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공리들이 “집합론의 빈약한 공리들”이 될 것이라고 추론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가 수학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모든 공리들보다 확실히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전체 이론”이 재귀적인 공리들의 (무한)집합을 이미 포함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어떤 유한개의 공리들을 좀더 작은 유한개의 공리들로 대체하는 것이 공리들의 수를 줄일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전체 이론이 오직 유한하게 많은 공리들만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러한 집합론의 공리들을 위해서 수학의 모든 공리들을 제거하는 것이 전체 공리의 수를 줄이는 결과를 초래할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집합론의 체계에 의존할 것이다. 만약 무한한 수의 공리를 갖는 집합론 (Zermelo-Fraenkel's)을 택한다면 전체 이론의 공리 수는 줄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집합으로 모든 공리를 환원시킴으로써 공리의 수가 줄지는 않더라도 이론의 통일성은 확보되지 않을까? 모든 공리들은 한 종류의 것, 즉 집합들에 대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 역시 추가적인 탐구를 필요로 한다. 모든 수학적 개념들에 대한 집합 이론적인 것으로의 보통의 환원은 많은 정의들을 필요로 한다. 전형적인 형식화된 이론에서, 정의들은 공리의 지위를 갖는 대상 언어 문장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집합론적 공리들에서만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관계들, 함수들, 숫자들, 벡터들, 공간 등과 같은 것들과 같은 수학적 대상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우리는 엄청난 수의 정의적 공리들을 추가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이것을 진척시키는 방법과 환원되지 않은 방법 간의 차이는 굉장히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집합론적 환원의 관점에서, 우리는 집합들의 논의영역에서 출발하여 이 논의영역을 관계들, 함수들, 숫자들, 공간들 등으로 확장할 것이다. 대부분의 실천적인 수학자들의 대안적인 견지에서 우리는 수학적 대상들의 논의영역에서 출발하여 이 논의영역을 집합들, 관계들, 함수들 등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조적인 과정들 간에 큰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수학에 대한 집합론적 접근 방법에 장점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는가에 대한 규칙들이 분명하게 되는 수학에 대한 좋은 통일적 접근법을 갖는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집합론적 실재론자들은 이러한 장점들을 지나치게 과장하였다. 집합론자들의 방법이 모든 장점을 갖는다는 거싱 분명한가? 결국, 집합론자의 방법을 위해서는 지나치게 비싼 가격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즉 최종적인 이론은 더 복잡하고, 가르치기에 기교적이며, 작업하기 어렵고, 이해하기에 더 어려울 것이다. 물리학자들에게 집합론 안에서 완전히 작업하기 위해서 필요한 추가된 상세한 요소들은 불필요하고, 혼란스러우며 물리학적으로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한 환원을 성취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전적으로 의미있다는 것이 분명한가? 확실히, 그러한 관점이 집합들에 대한 우리의 존재믿음을 지지한다면, 상세하고 설득력있는 논변이 요구될 것이다.
더 기본적으로, 우리의 “전체 이론”의 공리들과 원초들의 다양성을 줄이는 것에서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가? 우리가 루이스의 교설에 대한 설명을 연역할 수 있는 확정 이론이나 정당화 이론에 대한 어떤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일반 원리들에 대해서도 나는 알지 못한다. 명제 연산의 경우를 고찰해 보자. “수학 원리”의 2판 서문에서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지난 14년 ed안의 수리 논리에서의 작업에서 가장 분명한 발전적 결과”는 Sheffer가 강조한 것으로 알려진 ‘|’ 연결사를 ‘∨’와 ‘~’의 원초적 논리적 연결사들 두개로 교체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것은, Sheffer의 관점에서 형식화된 단 하나의 공리에 의해 “수학 원리”의 명제 연산에 대한 다섯 개의 공리들이 대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치된 두 연결사들 중 첫 번째 것은 2항 연결사이고 두 번째 것은 1항 연결사이다. 대치하는 체계는 오직 2항 연결사 하나만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