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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양상 논리에 대한 개괄

 

[요약 번역]: Necessity and Possibility: The Metaphysics of Modality라는 책(편집자: Michael Tooley)의 책, 맨 앞 장인 Introduction의 내용입니다. (책 소개는: 외국 철학책 소개란을 참조) 완역은 아니고, 대략적인 번역입니다.

제목 : Necessity and Possibility(The Metaphysics of Modality)
Edited, with an introduction by
Michael Tooley
University of Colorado.

New York & London
1999


개괄(Introduction)

필연성과 가능성들에는 다양한 유형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법칙론적인(nomological) 양상들이 있다. 즉 어떤 사태들은 법칙론적으로 필연적이며, 다른 어떤 것들은 법칙론적으로 가능하고, 다른 것들은 법칙론적으로 불가능하다. 유사하게, 인과적 양상들이 있다. 즉 어떤 사건들은 인과적으로 필연적이거나 혹은 결정적이며, 다른 것들은 인과적으로 가능하고 또 다른 것들은 인과적으로 불가능하다. 도덕적 양상들도 있다. 어떤 행위들은 도덕적으로 필연적이다. 즉 그것들은 의무인 행위들이다. 다른 행위들은 도덕적으로 가능하다. 즉 그것들은 허용가능하다. 또 다른 행위들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그 행위들은 도덕적으로 금지된다. 혹은 다시, 분석적인 양상들이 있다. 총각들이 미혼이라는 것은 분석적으로 필연적이며 총각들이 낙천적이라는 것은 분석적으로 가능한 일이며, 그들이 여러 명과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석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양상들은 더 기본적인 유형의 양상에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논리적 양상이다. 따라서 어떤 사태의 비존재가 자연 법칙들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함축된다면 그 사태는 법칙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떤 사건은 그 사건의 발생이 다른 사태와 함께 인과적 법칙들에 의해 적당한 방법으로 논리적으로 함축된다면 인과적으로 필연적이다. 어떤 행위는, 누군가가 그것을 해야 한다는 명제가 올바른 도덕 법칙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함축된다면 도덕적으로 필연적, 혹은 의무적이다. 그리고 하나의 언명은 그 의미 분석이나 동의의 관계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함축된다면 분석적으로 필연적이다.

이 책의 논점은 논리적 필연성, 가능성, 그리고 불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들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기본 쟁점은 단순하다. 논리적 양상들에 대해서 어떤 설명이 주어질 수 있는가? 논리적 필연성, 가능성, 그리고 불가능성의 개념들은 모두 분석될 수 잇는가 아니면 최소한 이들 중 하나만이라도 원초적인 개념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양상 개념들을 포함하는 언명들을 참이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윌리엄 라이칸의 매우 도움이 되는 두 개의 논문들과 함께 시작하며, 거기에서 그는 논리적 필연성에 대한, 지금까지 제시되어 온 가장 중요한 접근들을 많이 탐구하며 그러한 대안적인 설명들 중의 선택에 대하여 연관된 다수의 논변들을 시작한다.
다음의 절들에서, 주된 대안들이 제시되고 검토될 것이다. 그 중의 첫 번째는 양상 실재론의 한 형태이고, 이 이론에서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임의 속성이 단순히 기본적이며 어떤 명제들의 환원불가능한 속성이다. 둘째로는, 양상에 대한 데이빗 루이스의 접근이며 구체적인 다른 세계들에 대한 공준에 근거한다. 셋째로는 논리적 양상성들에 대한 다양한 환원주의적 접근법들이고 넷째로는 양상 허구주의적 설명이다.

이 책은 그리고 나서, 좀 덜 기본적인 것들을 강조하는 다수의 논문들과 함께 결론을 지으며 하지만 이것들은 매우 중요한 쟁점들이다. 즉 통 가능세계들 간의 동일성에 대한 어떤 설명이 주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여기서 물음은 동일한 개체가 다른 가능 세계들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 혹은 반대로 데이빗 루이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어떤 개체가 하나 이상의 다른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다른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보다 약한, 상대역 관계이며, 이 상대역 관계는 다른 세계들 속의 개체들 간에 성립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양상 실재론 대 양상 환원주의

양상 실재론과 양상 환원주의는 어떻게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는가? 이것은, 어쩌면 놀랍게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양상 실재론”과 “극단적인 양상 실재론”과 같은 표현들이 데이빗 루이스가 개진한 양상에 대한 접근법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고, 이에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적 영역은 무한히 많은 세계들 중의 하나일 뿐이고, 많은 가능 세계들은 우리 세계가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알빈 플란틴가(Alvin Plantinga)는 그의 논문 “양상의 두 개념들: 양상 실재론과 양상 환원론”에서 루이스의 접근법은 비록 분명히 실재론의 극단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양상 실재론의 한 형태도 아니고 극단적이거나 다른 것도 아니며, 그 까닭은 양상 진술에 대해 루이스가 제시하는 참이게 하는 것이 오직 비 양상적 사실들(non-modal facts)에만 연관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플란틴가는 양상에 대한 루이스의 접근법은 실제로는 실재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환원론적인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다른 분야에서 환원주의적 접근법과 실재론적 접근법을 구분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환원주의자들은 받아들이지만 실재론자들은 거부하는 몇가지의 유관한, 전반적인 수반 태제들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 존재자에 대해 환원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이론적 존재자에 대한 모든 사실들이 관찰가능한 존재자들에 대한 사실들에 수반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인과관계에 대해서 환원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과 관계들과 인과 법칙들이 비 인과적 사태들의 총체에 수반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자연 법칙에 대해 환원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자연 법칙들이 세계의 총체적인 역사에 수반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상 환원주의는 다음 수반 테제를 수용하는가 하는 점에서 특성화될 수 있는 것 같다.

양상적 사실들은 비 양상적 사실들에 수반한다.

그렇다면, 양상 실재론은 이 수반 태제를 거부하는 것과 관련된다.

만약 이렇게 구분하는 방법이 채택된다면-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합당해 보인다- 그러면 플란틴가가 루이스의 접근법을 분류하는 점에서는 옳았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루이스에 따르면, 말하는 당나귀가 있을 수도 있었다라는 것을 참이게끔 하는 것은 말하는 당나귀를 포함하는 시공간적 우주-우리의 우주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가 있다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시공간적으로 격리된 우주들 속에 말하는 당나귀들의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세계가 말 못하는 당나귀들을 포함한다는 것만큼이나 양상적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루이스의 접근에 따르면 양상 진술들에 대한 진리 조건들은 비 양상적 사실들로 구성되며, 따라서 루이스는 양상 환원주의자이다.

하지만 만약 루이스의 접근법이 양상 실재론의 사례가 아니라면 무엇이 양상 실재론인가? “가능세계들”이라는 논문의 Robert Stalnaker와 “양상의 두 개념들: 양상 실재론과 양상 환원주의”에서의 플란틴가 같은 철학자들은 만약 어떤 사람이 사물들이 그러했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가능 세계들의 존재를 긍정한다면 - 그리고 거기에서 그러한 가능세계들은 루이스의 구체적인 세계들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존재자들이면 - 그러면 그는 양상 실재론자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것은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한 추상적 존재자들의 존재에 관련된 사태들을, 비 양상적 사태들이라기 보다는 양상적 사태들로서 분류해야 하는가? 이 비 양상적 사태들은 구체적인 시공간적 세계의 일부분이라기보다는 이러한 내포적 대상들의 영역의 일부분인데 말이다. 하지만 만약 이것들이 비 양상적 사태들이라면, 그러한 접근법은 위에서 언급된 수반 태제에 대한 어떤 거부와도 관련되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가지는 것은, 다시 한번, 양상 환원주의의 다른 유형일 뿐일 것이다.

결말은, 양상 실재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환원불가능한 양상적 사태들을 가정해야 하며 이것은 다시 환원 불가능한 양상적 속성들의 가정을 요구한다. 하지만 어떤 저자들-「다 세계성에 대하여(On the Plurality of Worlds)」라는 책에서 발췌된 데이빗 루이스의 입장과 같이-은 양상성의 이론에 의한 ‘원초적 양상성’의 수용을 문제시되는 이론을 조건부적으로(prima facie) 의미있게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래야만 하는가하고 불어볼 필요가 있다. 결국, 물리학의 이론적 존재자들에 대한 관점에서 실재론자들이, 예를 들어, 음의 전하를 갖는 단위들과 같은 많은 속서들이 환원불가능하다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많은 철학자들이 이 입장이 문제있다라는 것을 발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필연성을 명제의 환원불가능한 속성들로서 취급하게 되면 왜 그래서는 안되는가?

이 쟁점에 대해서 생각함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주어진 ‘속성’이나 관계가 원초적이고 그래서 다른 속성들이나 관계들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주장과 상응하는 ‘개념’이 원초적이라는 것, 즉, 분석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예를 들어, 인과관계가 속성들과 다른 관계들의 조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인과 개념이 불석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이다. 마찬가지로, 양상성이 논리적 필연성의 속성이 다른 속성들이나 관계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원초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필연적임의 개념이 분석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인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논리적 필연성의 사례는 인과의 사례나 물리학에서의 이론적 속성들의 사례와는 다를 것이다. 논리적 필연성의 개념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임의 속성에 대한 환원주의적 설명이 주어졌을 때만 분석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리고 우리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임이 우리가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그런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환원 불가능한 양상적 사실들이 있다라는 태제와 연관된 양상성에 대한 어떤 설명도 논리적 필연성의 개념이 이해불가능한 것임을 도출할 것이다. 그러면 원초적 양상성의 가정은 정말 나쁜 소식이며, 그와 연관된 어던 이론이라고 거부하기 위한 중대한 토대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그 사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논리적으로 필연적임의 속성의 환원불가능성이 그에 대응되는 개념의 분석불가성, 즉 양상 실재론을 가장 자연스런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 같다라는 입장을 함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때까지 말이다.

 

양상 실재론

그와 같이 파악한다면 양상 실재론에 대해서 말할 바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형식화되는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능세계들”이라는 논문에서 Robert Stalnaker에 의해서 발전된 양상성에 대한 접근법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스톨네이커에게는 가능세계들이란 세계들이 그랬을 수도 있는 방식들이며 그는 데이빗 루이스에 반대하여 어떤 구체적인 것도 세계들이 그랬을 수도 있는 방식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스톨네이커에게 있어서 가능세계들이란 추상적 존재자들이다.

어떤 종류의 추상적 존재자들인가? 그 답은 “현실성의 이론들”(Theories of Actuality)라는 논문에서 개진된 Robert Adams의 입장과 자신의 입장을 비교한 Stalnaker의 비교에서 나타난다. 아담의 설명에 따르면 가능세계들은 “세계 이야기들”과 동일시된다. 여기에서 세계이야기들이란 명제들의 최대 일관적인 집합들이다. Stalnaker는 명제의 관점에서 가능 세계들을 분석하는 것보다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다고, 그리고 가능세계의 관점에서 명제들을 분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특히, 우리는 명제를 가능세계들의 집합과 동일시할 수 있다. 이 가능세계들에서 문제시되는 명제가 참이다.

이 분석이 조금이라도 합당하려면 그리고 가능 세계들이 루이스의 입장과는 반대로 구체적이지 않다면 가능세계들 자체는 내포적(intensional) 존재자들임에 틀림없다. 특히 그것들은 최대 일관적 명제들임에 틀림없다. 아담의 완전한 세계 이야기들에 대응되는 명제들 말이다. 그리고 Stalnaker는 이러한 특성호를 기뻐할 텐데,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지칭할 수 있는 가능세계들은 거기를 벗어나서는 명제들이 “명제적 요소들”로서 집합 이론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제안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에서 정의된 양상 실재론의 형식인가? 만약 스톨네이커가 옳다면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스톨네이커는 그의 접근법이 아담의 것보다 나은 장점 중 하나가, 아담은 명제들의 집합의 일관성 개념을 원초적인 것으로 다루어야 하지만, 일단 스톨네이커의 접근법이 주어지면 가능성의 개념이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가능함의 속성에 대해서는 어떤가? 그것은 환원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 대답은, 둘째로, 가능성 개념에 대한 스톨네이커의 분석이 건전하다면, 자신의 것에 대한 분석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명제들은 가능적으로 참이고 다른 명제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정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진술의 진리제공자는 논리적으로 가능함의 환원불가능한 속성의 어떤 것에도 관련될 수 없다. 그 진리조건들은 가능성 개념의 분석과 함께, 단지 명제 자체의 문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스톨네이커가 그의 접근법으로 인해 우리가 가능성 개념을 정의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옳은가? 스톨네이커는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분석에 착수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가지 확연한 제안은 명제 p가 참인 경우 그 경우만 p는 공집합이 아니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일테다. 왜냐하면 만약 p가 공집합이라면 명제적 원소가 없고- 그래서 스톨네이커 유형의 가능세계가 없으며- 거기에서 명제가 참이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만약 p가 최소한 하나의 명제적 원소를 갖는 집합이라면 p가 참인 가능세계가 최소한 하나 있다.

이 분석에 있어서의 문제는 오직 존재하는 명제적 원소들만이 가능성들에 대응하는 것들이라는 가정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왜 모순적 세계 이야기들에 대응하는 명제적 원소들이 있어서는 안되는가? 왜냐하면 세계들이 그랬을 수도 있는 방식들이 있는 것처럼 세계들이 가능하게 그럴 수 없었던 방식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자에 대응되는 명제적 원소들을 가정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으며 후자에 대해서는 왜 안되는가?

스톨네이커는 후자에 대응되는 것은 단지 공집합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세계들이 그러했을 수 없는 방식들에 대응되는 명제적 원소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증명을 제공할 수 없다면 명제적 원소와 같은 종류를 가정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도 불가능할 것이며 다른 것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스톨네이커의 접근법에는 모든 불가능성들이 하나의 것-공집합-과 같아진다는 결점이 있으며 두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둥근 사각형들이 있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거짓이라고 믿는다면 이들은 동일하게 같은 명제를 믿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스톨네이커의 가능성 개념에 대한 정의가 건전할 조건은, 도입된 명제적 원소들이 불가능성에 대응하는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아야 한다는 선행 제한을, 세계들이 그랬을 수도 있는 방식들에 부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제한사항은 정의를 순환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스톨네이커의 접근법은 가능성 개념을 정의하는 데 사실상 별 도움이 안되며 이것은 다시 양상적 사실들이 비 양상적 사실들에 수반한다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잘해야 양상 살재론의 한 형태일 것이다.

스톨네이커의 설명은 얼마나 만족스러운가? 답은 매우 심각한 반대들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스톨네이커 자신이 그 입장을 정식화하듯이 임의적이고 정당화되지 않은, 불가능 세계들의 배제가 있다. 물론 불가능 세계들을 인정함으로써 이 반대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가능성 개념이 정의가능해야 한다는 결정적인 요구가 포기되어야 한다.

둘째로, 스톨네이커 식의 가능세계의 관점에서 명제들을 분석하는 아이디어는 건전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에 따르면 필연적으로 동등한 명제들은 또한 서로 동일해야 한다는 결론이 따르며, 이것은 분명히 틀린 것인데 그 까닭은 우리는 한 명제를 받아들이면서도 그와 필연적으로 동등한 명제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톨네이커가 정의한 명제들은 명제적 태도의 적절한 대상들이 되지 못한다.

셋째로, 스톨네이커가 명제들을 다루는 방식을 매우 자연주의적 대안들과 비교해 보라. 이러한 자연주의적 대안에 따르면 기본 명제들은 형식 속에서 원자적이고 개별자에 속성들이 덧붙는 것이나 두 세 개의 개별자들에 관계들이 덧붙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한 접근법에서는, 개별자들과 속성들(보편자로 해석되건 정확하게 닮은 어구들의 집합으로 해석되건) 모두가 명제들의 구성요소들로 들어간다. 더욱이, 더 복잡한 명제들이 더 단순한 것들로 구성됨을 보임으로써 우리는 비록 필연적으로 동등하더라도 그 구조에서 다른, 그래서 우리가 서로 다른 명제들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명제들을 산출할 수 있다. 언급했듯이 스톨네이커는 이것을 할 수 없다. 더욱이 스톨네이커는 명제들을 가능세계들의 집합으로 취급함으로써 어떤 개별자들이나 속성들이 주어진 명제의 구성요소들인지를 결정할 방법이 없다.

넷째로, 스톨네이커가 자시의 기본적 명제적 요소들로서 완전한 가능 세계들을 취함에 따라 실 세계는 그의 입장에서 이상할 정도로 복잡하며, 더 단순한 요소들의 입장에서 분석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많은 것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원소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데이빗 루이스의 구체적인 가능 세계들이 그러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상식에 거슬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확실히 극단적으로 부풀어 오른 존재론, 그래서 가능하기만 하다면 피해야 할 존재론을 대표한다.

끝으로, 외계적 속성들에 의해서 제기된 문제가 있다. 즉 현실 세계에서 예화되지 않은 속성들 말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서, 어떤 민감한 존재도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미각 경험이 있을 수 있으며 이것은 그것이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결코 예화된 적이 없는 특질적 맛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제, 어떤 사람이, 그러한 속성을 포함하는 경험이 있을 수 있다라는 명제를 참이게 하는 것이 문제시되는 속성이 예화되는 가능세계가 있다라는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가능 세계들이 스톨네이커의 방식으로 파악된다면 유관한 속성을 구성요소로서 포함하는 명제적 원소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명제의 구성요소들로서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속성들이 있다. 비록 그것들이 예화되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스톨네이커의 분석은 예화되지 않은 속성들을 받아들이는 우를 범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달갑지 않은 것이다. 첫 번째로 데이빗 암스트롱과 데이빗 루이스 같은 철학자들은 예화되지 않은 속성들에 대한 결정적인 반대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예화되지 않은 속성들을 가정하는 것은 즐거이 할 만한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둘째로, 그런 논란거리의 쟁점의 입장에 연루되지 않은 양상에 대한 접근이 확실히 더 나을 것이다.

셋째로, 많은 철학자들은 세계가 실제로 포함하지 않는 속성들을 포함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것을 즐거이 수긍하면서도 예화되지 않은 속성들의 존재를 거부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들의 조합이 비일관적이라는 것, 또 현실 세계에서 예화되지 않은 속성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참이게 하는 것이, 그 속성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실 세계의 부분이라는 것이라는 것은 정말 합당한가?


David Lewis의 양상 설명

이제 양상에 대한 매우 다른 접근법을 살펴보자. 루이스의 것 말이다. 스톨네이커와 마찬가지로 루이스의 계획도 양상을 가능세계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이다. 즉 어떤 명제가 필연적으로 참일 조건은 그것이 모든 가능 세계에서 참인 것이고, 그것이 가능하게 참일 조건은 그것이 최소한 한 가능세계에서 참인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가능 세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다른 설명을 제공한다. 첫째, 어떤 가능 세계든 그 부분인 것은 단순히 존재한다. 즉 우리 세계에서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말이다. 둘째로 가능 세계들은 우리가 거주하는 현실 세계와 같은 종류의 것들이다. 가능한 개별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것이 성립한다. 가능 세계에서의 당나귀는 우리 세계에서의 당나귀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따라서 가능 세계들은, 예를 들어, 명제들이거나 사물들의 집합이거나 한 것일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우리의 세계가 이러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능한 개별자들에 대해서도 같다. 셋째로 이로보투 가능 세계들과 가능한 개별자들은 현실 세계의 부분일 수가 없는데 그 까닭은 현실 세계가 예를 들어, 유니콘이나 말하는 당나귀를 포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한 것들을 현실적인 것들로 환원하는 것은 어떤 것도 가능하게 옳을 수 없다. 넷째로, 만약 가능 세계들이 우리가 살고 잇는 세계와 같은 종류의 것들이라면 가능 세계들을 서로 구분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루이스의 대답은 존재하는 것의 총체가 시공간적 연결의 토대에서 나누어진다. 하나의 세계는 인과적으로나 시공간적으로 연결된 존재자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문제시되는 총체가 그러한 연관들에 대해서 최대이다. 끝으로, 시공간적으로 서로 고립된 세계들이 주어지면 어떤 개별자도 서로 다른 세계의 부분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동일성(identity)이 하나의 부분들을 같은 개별자와 서로 묶는 인과적 관계들을 가정하기 때문이며, 루이스의 주장에 따르면 사물들은 시공간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 인과적으로 연관될 수 없다.

루이스가 양상에 대한 이런 설명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능 세계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루이스는 사물들이 그러했을 수 있는 다른 방식들이 있다는 생각에 호소하며, 그래서 그러한 다른 방식들을 가능 세계들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한다.

루이스가 제시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설명이 양상 진술들에 대한 비 순환적인 진리 조건을 제시하는 반면 다른 대안들은 어떤 것도 양상 진술에 대한 건전하면서도 비 순환적인 진리조건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루이스가 제시하는 세 번째, 주된 논변은 가능세계들이 “철학자들의 낙원”이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러하다. 즉 가능 세계들과 가능한 개별자들을 지칭할 수 있음으로 하여 철학자들은 논리 철학, 심리철학, 언어 철학, 그리고 과학 철학을 포괄하는 많은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분석을 제공하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논의된 이유들에 관련해서 첫 번째 논변은 별로 강한 설득력이 없다. 사실, 스톨네이커가 주장하듯이, 이것은 루이스의 입장에 반대되는 이유를 제공하는데, 왜냐하면 현실 세계는 사물들이 그럴 수도 있는 방식으로서 적당하게 기술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논변들은 훨씬 더 실질적이며, 이것들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양상에 대한 다른 설명들을 주의깊에 살펴보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들이 심각한 반대에 노출되는지, 또 루이스가 그의 접근법으로 인해 가능해진다고 말하는 철학적 작업들이 가능 세계들에 대한 다른 대안적 설명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만큼 잘 수행될 수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양상에 대한 루이스의 설명에 대한 반론들

어떤 반론들이 루이스의 설명에 대해서 제기될 수 있는가? 당장 제기될 수 있는 첫 번째 반론은, 루이스가 옳다면 존재하는 것의 총체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믿는 것보다 훨씬 커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적 영역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계로부터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다른 세계들이 무한히 많으며,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무수한 것들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약정신에 따라서 루이스의 접근법을 거부할 prima facie(조건부의) 강력한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다.

때때로, 이것이 루이스에 반대하는 한 이유이지만 그것은 절약의 문제는 한 이론이 질적으로 상이한 것들을 가정할 때 주어진 것에 대해 단지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하는 것보다 .... 그렇다면 그 아이디어는 루이스가 단지 우리가 이미 가정한 것보다 더 많은 것, 즉 세계들을 상정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적 고려와 양적 고려 간의 구분은 여기서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루이스는 추가적인 세계들의 존재를 상정하면서도 그는 우리 세계에 있는 것들과는 그 종류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다를 수 있는 개별자들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령이나 신, 그리고 데카르트의 영혼들 말이다.

두 번째 반론은 일반인들은 말하는 당나귀가 존재한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또한 우리가 말하는 당나귀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 세계와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우주에 그러한 말하는 당나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인은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은 진술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말하는 당나귀가 우리 자신의 시공간적 우주 속에나 혹은 우리의 세계와 시공간적으로나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다른 시공간적 우주 속에도 없다고 할지라도 말하는 당나귀는 있을 수도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일상인은 루이스의 존재론을 거부할 뿐만이 아니다. 그는 루이스가 제시한 분석과는 호환되지 않는 양상 진술의 의미에 대한 직관들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일상인의 직관은 강건해서, 루이스의 분석과 상충할 때 사람들은 그 문제시되는 직관이 잘못된 것이라고 결론짓지 않으며 양상 언어가 루이스가 주장한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내리지 않는다.

세 번째 반론은 세계에 대한 루이스의 정의와 관련된다. 루이스의 입장처럼, 사물들이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의미에서 다른 세계들에서도 존재한다고 한다면 사물들을 다른 세계들 속으로 나누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루이스의 제안은 시공간적 단절이 사물들을 다른 세계들에 나누는 것이다. 혹은 아마도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관련된 사물들 간의 어떤 외적인 관계들도 없다는 것이다. 루이스의 존재론이 그렇다면 이것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설명이다. 사실 그 이외의 다른 대안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것이 적절한가? 라이칸이나 다른 사람들이 제안했듯이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부분들을 포함하는 세계는 있을 수 없는가? 혹은 시공간적이지 않은 세계들은 있을 수 없는가?

넷째로, 루이스의 설명에 대한 기술적인 반론들이 있다. 그 중 가장 흥미있는 것은 “데이빗 루이스의 가능 세계 이론에 대한 반박”이라는 논문에서 데이빗 암스트롱과 피터 포레스트에 의해서 제시되었는데, 거기서 그들은 모순으로 인해 모든 가능세계들의 집합이나 모든 가능 세계들의 덩어리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논박했다.

다섯 번째 반론은 가능세계들의 지위에 초점을 맞추며 특정한 세계들의 존재가 필연적인지 우연적인지를 묻는다. 만약 어떤 세계들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 우연적인 문제라면 필연성이 모든 가능 세계들에서 참인 것으로 정의될 때 주어진 명제가 필연적으로 참인지 아닌지 하는 것 역시 우연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세계 W가 그 존재가 필연적인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자 할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세계 W가 존재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참이기 위해서는 W가 존재한다는 명제가 모든 세계에서 참이어야 하고 이것은 다시 다른 세계 W*가 W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참이게끔 하는 것을 포함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러한 진리제공자가 무엇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루이스의 입장에 따를 때 우리는 특정한 세계들의 존재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명제들의 양상적 지위가 그 자체 필연적이라기보다는 우연적이라는 것이 따라 나온다.

여섯 번째 반론-이건 라이칸에 의해 개진되었다.-은 가능 세계들이 추상적인 것들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존재자들이라면 불가능한 세계들이 있을 수 없으며 이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가능한 세계들도 역시 철학적으로 유용하며, 예를 들어서 반사실들(counterfactuals)에 대한 의미론을 제공하기 위해서 유용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두개의 반론들은 인식론적 문제들과 관련된다. 첫째 그러한 다른 세계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루이스의 답변은 어떤 양상 진술들이 참이라는 것을 알며 이 사실이 양상 진술에 대한 올바른 분석과 결합되었을 때 다른 세계들이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양상 직관들을 신뢰할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자연스러운 답변은 무엇이 논리적으로 가능하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한가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이 자주 우리가 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며, 우리는 자주 우리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사태들을 산출하려는 시도가 성공적임을 발견한다. 그래서 몇가지 양상 판단들은 검정될 수 있고 검증되어 왔으며 이에 따라 우리의 양상 직관들이 일반적으로 신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가? 만약 우리가 다른 세계들로부터 인과적으로 단절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세계들에 대한 참인 믿음들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는가? - 신의 간섭을 배제하고.

마지막 반론도 밀접히 관련되는데, 하지만 그건 양상 진술에 대한 분석이 인식론적 고려에 으해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양상 명제들의 진위에 대한 지식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둘째로 이 지식은 다른 가능 세계들에 대한 조사에 근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셋째로 이 지식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무언가가 실제 세계에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넷째로, 우리의 양상적 지식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또한 유관한 양상 진술들에 대한 진리제공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실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양상 진술들을 분석하는 것은 옳을 수 없다.

 

양상과 가능 세계들에 대한 환원적 접근법

이제 양상과 가능 세계에 대한 환원론적 설명에 관심을 가져 보자. "대용물적(ersatz)" 가능 세계들을 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비 양상적 존재자들, 혹은 사태들은 무엇을 도입하려 하는가?

주된 가능성들이 이것인 것 같다. 첫째, 우리는 ‘완전한 세계 이야기’의 입장을 채택할 수 있으며 이것은 예를 들어서, 루돌프 카르납이 채택한 접근법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의 발상은 가능세계들을 언어적 존재자들의 집합으로, 특히 상호 최대일관적인 문장들의 집합으로서 취급하는 것이다. 이 때 최대 일관적이라 함은, 추가적인 어떤 문장을 이에 더하면 항상 비일관성이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가능세계들을 언어 의존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 설명을 선호할지 모른다. 그런 경우 로버트 아담스의 입장을 따를 수 있는데, 문장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명제의 관점에서 언어적 세계 이야기 설명을 받아들인다.

세 번째 접근법은 피터 포레스트가 제안한 것인데, 가능 세계들을 복합적으로 구조적인 우주들로 분석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 접근법은 확실히 명제적 설명과 밀접히 관련된다. 하지만 포레스트의 대안에는 두가지 가능한 이점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보편자들은 명제들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기본적인 것으로 보이고 우리는 집합들을 포함하는 존재론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네 번째 접근법인 대용적 가능세계들은 콰인이 그의 논문 “명제적 대상들”이라는 논문에서 발전시킨 것이고 맥스 Cresswell은 그의 논문 “세계는 사례인 모든 것이다”라는 논문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콰인은 우선, 우리가 가능세계들을 시공간의 점들의 집합, 직관적으로는 점유된 모든 시공간의 점들의 집합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시공간의 접들을 어떤 존재론과 결부시키는 것을 피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므로 이 시공간의 점들을 실수들의 네 순서쌍으로 대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한다.(Cresswell 의 가능세계 입장도 매우 유사하지만, 실수들의 네 순서쌍으로 이전하는 점에서 콰인을 따르지 않는다.)

가능세계들에 대한 설명 중에서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것 중 마지막 것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처음 제기된 조합주의적 접근법인데, 이것은 Brian Skyrms가 “논고적 유명론”이라는 논문에서 개정했고, 다시 David Armstrong이 「가능성에 대한 조합주의적 이론」이라는 책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그 핵심 생각은 현실 세계의 형이상학적으로 기본적인 구성 요소들인 속성들과 개별자들로부터 출발해서 이러한 형이상학적 원자들의 재 배열이 가능세계들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현실 세계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지는 않거나 혹은 추가적인 원소들을 포함하는 가능세계를 허용해야만 한다. 전자는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지 않지만 후자는 다르다.

 

양상과 가능세계들에 대한 환원론적 접근법에 대한 반론들

양상 형이상학에 대해 작업하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필자 생각에, 몇 가지 유형의 환원론적 설명, 그리고 그러한 설명의 호소력은 분명하다. 환원적 설명은 대용적 세계들을 제공함에 있어서 가능세계의 틀의 장점들을 부가하면서도 터무니 없고 그럴듯하지 않은 존재론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하여 루이스의 설명에 주어지는 많은 반론들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루이스는 환원론적 접근법들이 최소한 유사하게 심각한 반론들에 노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f이스는 양상과 가능 세계들에 대한 모든 대용 이론들이 세가지 반론들에 직면한다고 주장한다. 그 첫째는 환뤈론적 접근법은 실제로 양상에 대한 환원적 접근법을 제공하는데에 성공하지 않는 것 같다. 주의깊게 고찰하면, 그러한 접근법은 정당화되기 어려운 양상적 판단들을 도입하고 잇는 것으로 당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가능세계들을 명제들의 최대 일관 집합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전체 이야기 접근법은 유관한 명제들의 논리적 호환성을 주어진 것으로서 취급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순환성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구성된 대용적 가능 세계들의 관점에서 그것을 분석할 수 없게 된다. 상황은 전체 이야기 접근법의 많은 언어적 판들의 경우에도 정확히 같다. 유사하게 대용적 세계들에 대한 조합주의적 접근법은 어떤 재조합들은 허용하는 반면 다른 것들은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서 빨갛고 둥근 것이 있는 세계는 허용되지만 빨갛고 녹색인 것이 있는 세계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합들은 속성들 간의 논리적 비호환성의 선행 관계에 의해서 제한된다.

루이스의 두 번째 반론은 환원론적 접근법이 어떤 양상 진술들에 대해서는 잘못된 진리값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특히 어떤 가능성들이 분명하거나 분명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어떤 환원론적 접근법들은 구분되는 가능성들을 같은 것으로 하고, 반면에 다른 환원론적 접근법들은 단일한 가능성만이 있는 서로 다른 가능성들의 존재를 함축할 것이다.

이러한 두 실패들 중에서 전자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며 환원론적 접근법의 대부분에서 나타난다. 그 분명한 사례는 외계적 속성들에 의해서 제시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특히 효과적인 방법으로 정식화 하는데, 이에 있어서 그는 우리의 세계를 한편으로는 현재 존재하는 기본 속성을 갖지 못한 다른 세계와 비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기본 속성을 가진 다른 세계와 비교한다. 그리하여 예화를 위해서, 색깔들이 기본 속성들이라 가정하고, 색깔들이 없다는 점 외에는 우리 세계와 같은 한 세계를 고려해 보자. 우리가 그런 세계에 산다면, 색깔이 현실 세계에서 갖는 인과적 역할을 가지는 어떤 별도의 속성들이 있다는 생각을 정식화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특정 색깔들이 그러한 역할들을 가지는 다른 방식들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 세계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존재하는 가능 세계와 이 세계의 색상이 전도된 것과 같은 세계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구분된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들은 색깔이 없는 세계의 자원들만이 주어진다면 구분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이러하다. 즉 세계는 더 적은 수의 기본 성질들만 가진 세계의 사람의 상황에 비교될 수 있는데 추가적인 속성들을 가진 세계가 있을 수 있는 다른 방식들이 있고 그러한 분병한 가능성들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다.

환원론적 접근법이 이 두번째 반론을 피할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외계적 속성들이 정의상 현실 세계에서 사례화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의 부분이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 루이스의 세번재 반론을 피할 길 없다. 즉 우리는 그 존재론이 결코 문제가 없을 수 없는 그런 환원론적 접근법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우리는 사례화되지 않은 속성들을 상정하고 있으며 , 그것은 많은 철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여기서 현실 세계에서 사례화되지 않은 속성들의 존재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줄 수 있는가? 모든 속성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철저한 플라톤주의를 취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속성들은 초월적이고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루이스의 반론은 얼마나 강제력을 갖는가? 첫번째 것은 의심스러워 보이는데, 그 까닭은 원초적 양상성이 어떤 관점에서나 피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은 내게 분명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루이스는 붉음과 녹색임이 논리적으로 비호환적이라는 것을 환원불가능한 사실들로 취급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 비호환성을, 어떤 것이 전적으로 붉으면서도 부분적으로 녹색인 세계가 없다는 양화된 진술의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하지만 확실히 이 분석은 엄격히 잘못된 길을 가지고 있다. 문제시되는 종류의 세계의 비존재는 뻔한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붉음과 녹색임이 비호환적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설명된다.

두번째와 세번째 반론들은 더 심각해 보인다. 정말, 두번째 반론의 경우에, - 특히 그 외계적 속성의 형식에서- 나는 이 반론에 노출된 어떤 설명도 그 이유에서 거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세번째 반론에서처럼 강하게 이 것들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루이스와 암스트롱의 견해와는 반대로, 사례화되지 않은 보편자들의 상정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들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관념은 좀더 문제있어 보인다. 그래서 최소한 우리는 그의 두번째 반론을 피해야 할 필요가 있는 존재론은 결코 문제없지 않다는 점에서는 루이스에게 동의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양상 허구주의

양상 실재론, 루이스의 설명, 다양한 형태의 환원주의와 같은 우리가 고찰한 모든 관점들은 심각한 반론들에 직면한다. 우리는 이것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다른 대안들이 있는가?

답은 최소한 두가지 가능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기든 로슨이 “양상 허구주의”라는 논문에서 발전시킨 관점이다. 간단히 말해 로슨이 제안하는 것은 우리는 양상 실재론이나 루이스가 발전시킨 양상에 대한 접근법의 장점들을 그에 상응하는 존재론의 함축 없이도 향유할 수 있는데, 이것은 “p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라는 형식의 문장을 “p라는 것이 참인 가능세계가 있다”라는 형식의 문장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종류의 문장으로 번역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양상 실재론에 따르면 p가 참인 가능 세계가 있다.’

‘양상 실재론에 따르면’이라는 어구를 덧붙임으로써 우리는 확실히 가능세계들에 대한 모든 부담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번역이 건전한 것인가? 그로 인해 우리는 양상 실재론에 의해 주창된 장점들을 확보할 수 있는가?

첫번째 물음에 관한 한, 로슨의 허구주의적 문장들은 정상적인 양상 진술의 의미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첫째로, 서로 다른 형태의 양상 실재론이 있고 어떤 양상 진술들에 대한 진리 값에 대해서 견해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동일한 개별자가 서로 다른 가능세계들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말 그대로 참인가하는 것. 우리가 양상 진술을 만들 때 우리는 특정한 이론을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가? 둘째로, 무엇이 필연적이거나 가능한가에 대한 진술들이 정말로, 어던 이론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진술들이라는 것이 합당한가?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문제시되는 이론이 참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면, 허구주의적 방식으로 해석된, 어떤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관심거리일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진술들이 어떻게 행위의 기초가 될 수 있는가? 특히, 그러한 진술의 진위에 대한 믿음이 왜 우리에게 어떤 것을 결과하도록 시도하려는 이유를 제공하는가?

두번째 쟁점은 어떤가? 양상 허구주의는 양상 실재론의 장점을 무료로 확보하는가? 이것은 존 다이버스가 그의 논문 “양상 허구주의는 가능 세계 의미론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주창한 쟁점이다. 여기서 다이버스는 양상 담론을 위한 가능 세계 의미론과 연관된 장점들에 대해 물으면서 시작하여 그 가치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양상 진술들이 가능 세계 언어로 변역될 때, 그러한 진술들에 관련된 논변들을 완전히 외연적인, 정상적인 술어 연산의 직접적인 적용을 통해 평가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말이다. 간단히 말해 가능세계 의미론은 양상 논변을 외연화한다. 다이버스는 하지만, 이 외연화가, 정상적인 양상 진술들을 위해 제안된 가능 세계 번역이 실제로 그러한 진술의 의미를 보존한다고 믿을 좋은 이유가 없다면 흥미거리가 안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양상에 대한 접근-양상 허구주의와 같은-이 양상 진술에 대한 가능세계 의미론을 위해 주창된 동일한 장점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면 두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제안된 번역들은 정상적인 양상 진술들의 의미를 포착하여야 한다. 둘째로, 그 번역은 술어 연산을 통해서 주어진 논변이 타당한지를 우리가 결정할 수 있게끔 논리적 진술 형태를 가져다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이버스는 로슨의 양상 허구주의의 경우에 이 두 조건들이 만족되는지를 고찰한다. 그리고 매우 자세하고 주의깊은 방식으로 이러한 조건들이만족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양상 허구주의는 가능세계 의미론을 위해 주장된 장점들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결론짓는다.

 

제거주의

마지막 대안은 제거주의이다. 이 입장은 첫째로, 가능 세계들과 가능한 개별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진술들이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가능 세계들이나 가능적 개별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표현들은 지시하지 않는 표현들이라는 것이다. 두번째로, 그렇다면, 진짜건 대용물이건 간에 가능세계들에 호소하여, 양상 진술들에 대한 진리 조건들을 서정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진리 조건들은 다른 방식으로 형식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자연스러운 출발점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일 것이다.

p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 p는 -p를 도출하지 않는다.

다른 방식으로는, 부정 기호없이 이렇게 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p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 (∃q)(p는 q를 도출하지 않는다.)

어느 경우에서든 물론, 우리는 도출(함축)의 관념을 도입한다. 이것은 함축적으로 양상적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개념이다. 하지만 도출에 대한 설명을 계속해서 제공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생각은 겐쩬 유형의 자연 연역 체계를 도입하는 것일텐데, 여기서 기본 추론 규칙들은 연결사들의 도입과 제거 규칙들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연언의 제거 규칙이 있다. p&q라면, 우리는 p를 추론할 수 있고, q도 추론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p와 q가 같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p&q를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이 연언에 대한 도입 규칙이다. 그리고 그 기본 관념은 이러한 규칙들에 대한 신비스러운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가능세계들의 틀을 요청함으로써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문제시되는 규칙들은 연언의 의미에만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 접근법은 물론, 형식적 함축만을 포착하며, 그래서 우리가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존이 결혼한 총각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의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좁은 의미의 형식적 도출을 개념을 분석적 도출이라는 넓은 관념으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다 주지는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분석적 도출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더라도 그 설명은 어떤 것이 동시에 붉기도 하고 녹색이기도 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과를 산출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내가 물었듯이 우리는 루이스를 포함한 모든 양상에 대한 접근법이 비호환적인 성질들을 포함한 양상들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는지를 물을 수 있다.

제거주의를 논의하는, 이 책에서의 유일한 논문은 라이칸의 “가능세게의 문제들”이다. 하지만 ‘Paraphrastic' 프로그램이라고 그가 지칭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버트런트 러셀의 "지칭에 관하여“에서의 가능한 대상들에 대한 취급과, 크립케의 제안에만 한정된다.

제거주의적 접근법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무슨 이유가 있는가? 대답은 제거주의적 접근법은 다른 접근법들에서 생겨난 심각한 문제점들을 완벽하게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존재론이 필요하다. 제거주의적 접근법은 어떤 존재론적 견해와도 결합될 수 있다. 둘째로, 외계적 속성들에 연루된 가능성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속성들, 그리고 그러한 속성들만을 실제로 포함하는 집합 N 을 가정하고 다음의 진술 S"집합 N에 속하지 않는 P 와 Q라는 서로 다른 속성들이 있으며 다른 인과적 역할들 I 와 J가 있다. 속성 P 가 인과적 역할 I를 가지며 속성 Q 가 인과적 역할 J 를 갖는 것이 가능하다. 속성 P가 인과적 역할 J를 갖고 속성 Q는 인과적 역할 I 를 갖는 것도 역시 가능하다“. 이 진술에서 모순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제거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S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이 후자의 진술은 구조적으로는 동일한 그러면서도 구분되는 외계적 속성들과 연관된 가능성들이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다.

결말은 제거주의는 에퍼서 우리가 본, 환원주의적 접근법에 대해 루이스가 제기한 세 반론들에 대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첫번째로 수용되어야 하는 유일한 원초적 양상성은 비호환적 속성들의 관념에 관련된 것이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다른 접근법이 여기서 더 나은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방금 본 바와 같이 외계적 속성들의 가능성은 구분되는 가능성들의 동일화에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외계적 속성들에 관련된 뒤집힌 스펙트럼은 예를 들어, 완벽히 이해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셋째로, 제거주의는 다른 구체적 세계들이나 비예화된 초월적 속성들도 상정할 필요가 없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존재론도 필요치 않는 것 같다.

 

통세계적 동일성

이 책에서 논의된 마지막 쟁점은 통 세계적 동일성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어떤 것이 ‘세계에 한정되는’ 것이어서 모든 것이 오직 하나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어떤 것이 여러 세계들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것이다.

메리가 어떤 행위 A를 시간 t에 수행했다고 가정하자. 만약 그 대신에 메리가 좀 다른 행위 A*를 시간 t에 행했더라면 세계는 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메리를 포함하는 세계였을까?

확실히, 자연스러운 대답은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접근법에 따르면 이러한 대답은 제외된다. 특히 루이스류의 접근법에 따르면 동일한 개별자는 하나 이상의 세계에 말 그대로의 뜻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따라서 루이스는 상대역 관계라는 새로운 관계를 도입하고 그것은, 만약 메리가 시간 t에 다른 행위를 수행했다면 그 결과는 메리가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메리의 상대역이 존재하는 세계, 그리고 거기에서 메리의 상대역은 다소간에 현실 세계에서의 메리와 매우 닮은 유관한 가능 세계에서의 개별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개별자가 다른 가능세계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두 이유들이 있다. 첫째는, 가장 일반적으로, x 가 y 와 동일하다면 x 는 y 와 모든 속성들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메리가 행위 A를 시간 t에 했지만 다른 세계의 사람-메리*라고 부르자-는 시간 t에 행위 A*를 했다면 메리와 메리*는 최소한 시간 t에 행위 A를 행했다라는 속성에 있어서는 다르다. 결과적으로 메리는 메리*와 가능적으로 동일할 수 없다.

두번째 이유는 시간을 넘어선 동일성에 대한 어떤 주장을 담지한다. 즉 기본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 관계라기보다는 시간 속에서의 동일성이 시간적 요소들 간의 인과적 관계들에 수반한다는 것이다. 시간 t1에 존재하는 지속하는 개별자는 시간 t2에 존재하는 지속하는 개별자와 같은 하나의 개별자라는 사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자의 개별자의 t1 시간적 부분이 적절한 방식으로, 전자의 개별자의 t2 시간적 부분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긍된다면, 다음이 제안된다. 즉 인과가 시간 속에서 개별자의 부분들을 통합하는 관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개별자가 다른 가능 세계들이 존재할 수 있다면 인과는 다시 그 통합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하지만 루이스 류의 세계들 간의 동일성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러한 세계들은 정의에 따라서 시공간적으로, 그리고 인과적으로 서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상에 대란 다른 접근법들을 채택한다면 상황은 어떻게 비교되는가? 스톨네이커의 접근법의 경우에, 여기서 추상적인 가능세계들은 기본적인 명제적 원소들인데, 동일한 개별자들이 다른 가능 세계들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역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현실 세계에서의 어떤 개별자가 어떤 기본적, 명제적 원소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참이게 하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원주의적 접근법에서는 상황이 꽤나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가 조합주의적 접근법을 채택한다면 가능세계들은 최소한 첫번째 근사로서 현실 세계의 부분들인 것들의 단순한 재배열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리가 다른 가능 세계들의 부분일 수 없는가에 대한 이유가 없다.

유사하게, 만약 가능 세계들이 명제들의 최대 일관집합과 동일한 것이라면 우리가 단순히 현실 세계의 개별자들을 보편자들과 더불어 명제들을 구성하는 데에 사용될 ‘Ur-원소들’로 간주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이칸이 그의 논문 “두개의 아니, 세계의 가능 세계 개념들”에서 제시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빨리 움직이는 것이며, 이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로 Ur 원소들로 취급되는 이러한 존재자들은 무엇인가? 만약 Ur 원소들이 될 메리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개별자라면 그 개별자에게 있어서 참이 될 것들 중의 하나는 그녀가 시간 t에 행위 A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개별자가 어떻게, 시간 t에 행위 A를 어떤 개별자도 수행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의 부분일 수 있는가?

두번째로, 만약 메리가 Ur 원소이고 그녀가 현실 세계에서 가졌을 것과는 다른 속성들을 메리가 갖는 것이 가능하다면 메리를 포함하는 세계들의 유형에 어떤 제한이 있을 수 있는가? 만약 메리가 다른 세계에 존재할 수 있고, 그녀가 그 세계에서 시간 T에 행위 A가 아닌 행위 A*를 수행했을지라도 메리가 생물이라고는 전적으로 없는 세계에 존재하는 경우가 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만약 무엇 때문에 개별자가, 자신이 현실 세계에서 인 것과는 다소간에 전적으로 다른, 다른 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게 되는가?

이 두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데이비 루이스의 상대역 이론을 실질적으로 더 지지하게 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첫번째 지적 사항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개별자가 다른 가능 세계들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닮음이 우리가 언제 ‘같은’ 개별자를 다른 가능 세계들에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상대역 이론은 옳은 견해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번째로, 상대역 이론에는 몇가지 매우 심각한 반론들이 있다. 특히 그리고 Fred Feldman이 그의 논문 “상대역들”에서 매우 분명하게 보였듯이 누가 가능세계들 간에서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닮음의 정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세계가 어던 방식들로 달랐더라면 메리는 그 다른 세계에서 현실 세계의 메리를 닮기보다는 슈를 더 닮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며 슈에 대해서도 거꾸로 적용될 수 있다.

두번째로, 우리는 라이칸의 제안을 따라서 명제들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자유롭게 상요될 수 있는 Ur 원소들로서 지속적인 개별자들을 취급하는 것과 연관될 필요가 없다. 대신에 상대적인 Ur 원소들로서 순간적인 개별자들만을 가질 수도 있다. 따라서 Ur 원소인 것은 메리가 아니라 어떤 순간적인 개별자, 즉 시간 T0에서의 메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속저긴 존재자 메리는 어떤 지속적인 개별자가 되어서, 그것이 무엇이든, 시간 t0에서의 순간적 개별자 메리를, t0에서의 메리와 적절한 인과적 관계들을 갖는 다른 순간적 개별자들을 따라서 포함하는 것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메리가 다른 가능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지속적인 개별자가 있어서 그것이 시간 t0에서의 순간적 개별자 메리를 시간적 부분들과 관련해서 적절한 방식으로 다른 것들과 더불어서 구성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적인 견해에서는 하나의 동일한 사람 메리가 시간 t에 다른 행위를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뿐만 아니라, 단지 어떤 세계가 메리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연결된 다른 시간적 부분들과 함께 시간 t0에서의 메리를 포함하는 유일한 세계가 메리를 포함하는 세계일 수 있다.

더우기, 이 접근법에는 지속적인 개별자의 이름이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한다는 장점도 있다. 우리가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일 때 우리는 그 문제의 지속적인 개별자가 나중에 어떤 속성들을 가질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하는 것은 그러면, 어떤 순간적인 개별자를 잡아내는 것이고, 그래서는 그 지속적인 개별자를 지칭하기에 유용한 이름을 도입하는 것이다. 시간적 부분으로서의 그 순간적 개별자와 연관된 것이 무엇으로 드러나건 말이다.

이 접근법이 어떻게 가능 세계들 간의 동일성을 통합하는지를 보라. 그리고 시간 속에서의 동일성도 말이다. 3권에 대한 개괄에서 시간 속에서의 동일성 관계는 존재자들 간의 인과적 관계들에 논리적으로 수반한다고 믿을 좋은 이유가 있다고 우리가 본 것처럼, 가능 세계들 간의 동일성에 대한 현재의 설명은 그러한 동일성을 세계들 속에서의 적절한 인과 관계들의 문제로 만든다. 문제시되는 두 개의 가능 세계들 속에서 말 그대로 현전하는 순간적 개별자와 관련해서 말이다.

끝으로, Fedman이 상대역 이론을 직접 비판하는 반론들이 스톨네이커와 루이스의 반사실적 설명에 대한 몇가지 결정적 반론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유는 이렇다. 즉, 스톨네이커와 루이스의 반사실들에 대한 접근법이, 반사실들에 대한 진리 조건들이 가능 세계들 간의 유사성 관계들의 관점에서보다는 인과관계의 관점에서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처럼, 가능세계들 간의 동일성에 대한 루이스의 상대역 이론적 접근도, 순간적 개별자들과 관련된 적절한 인과적 연관의 관점에서보다는 닮음의 관계들의 관점에서 분석을 제공하려 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철학, 지식이 아닌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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