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실험적 사유(A Disquieting Suggestion)
매킨타이어는 하나의 가상세계를 상상할 것을 제시하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그 가상세계
는 자연과학의 언어, 또는 상당 부분이 계속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무질서
상태에 있는 세계이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즉 자연과학이 대재난의
결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다가는 파괴된다. 실험실과 과학지식을 담은 문헌들이 의도적
으로 파손된다. 한참 지난 후에 이 파괴적 운동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 과학을 다시 부활시
키고자 하는 세력이 생긴다. 이 때 남아있는 것은 단편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
든 단편들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이라는 부활된 이름으로 분류되는 일련의 실천체계로 다시
구현된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그들이 행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연과학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는 나름대로의 일관성과 정합성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맥락은 상실되어 버렸다.
이러한 가상세계를 매킨타이어가 상정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우선은 이러한 가정을 하나의
비유로 활용하여 오늘날 도덕에 대한 논의들에 나타나는 전체적인 의견 불일치의 근원이 전체적
인 맥락상실이라는 주장을 설득력있게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매킨타이어는 이러
한 맥락상실을 인식함에 따라서 생겨나는 대표적인 철학적 징후가 정의주의(Emotivism)이라고
전제한다. 자신의 철학적 과제 역시 정의주의와의 논쟁을 통해서 설정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가상세계에서 분석철학이나 현상학, 혹은 실존주의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 매킨타이어의 주장이다. 우선,
<1>분석 철학은 무질서의 사실을 폭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분석철학은 본질적으로 서술
적이며 현재 언어를 기술하고 과학적 사유와 담론의 개념적 구조들을 있는 그대로 해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2> 현상학이나 실존주의 역시 가상세계에서 나타나는 과학의 근원적 문제점을 식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지향성의 구조들은 문제 상황 이전과 이후에 마찬가지로 존재하기 때
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철학방법은 자연과학의 가짜 환영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이러한 가상세계에 대한 실험적 사유를 통해서 매킨타이어는 다음과 같이 도덕철학에 대한
물음으로 옮겨간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가상세계에서 단편화된 과학을 참된 과학이라고 믿는
것처럼 정말 도덕성의 환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많은 핵심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론적, 실천적 이해력, 또는 도덕성을 상실하였다. 그것은 마치
가상세계에서 우리가 가진 것이 어떤 개념적 기구의 단편들, 즉 이들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전체 맥락이 결여된 조각들 뿐인 것과 유사하다.
<반론> 매킨타이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즉, 도덕적 지각과 사고,
의사소통 능력은 우리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 핵심적이므로 이 점에서 우리가 무능할지 모른
다는 생각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대답> 이에 대해 매킨타이어는 두가지 점에서 반박한다.
1) 이상의 반론은 분석철학이나 현상학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하는데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이러한 철학적 분석이 우리를 도울 수 없다.
2) 동시에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무질서를 해결할 수 있는 한가지 해결방책을 제시함으로
써 자신의 주장의 검증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가상세계 속의 무질서 이해는 「자연과학
번성→파국→무질서한 복구」의 세 단계로 된 역사 이해이다. 도덕성에 관한 자신의 가설
탐구의 방안도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헤겔 혹은 콜링우드 식의 철학과 역사의 방법이 적절
할 것이다. (이것은 가치중립적인 연대기 서술이 아니라 성취와 실패의 기준을 전제한 역사
관을 가진 이해방식이다.)
<반론> 하지만 우리 실제 역사에는 가상세계에서와 같은 파국의 역사가 없지 않는가?
<대답>하지만 매킨타이어는 그와 같은 도덕성의 파국이 이미 학문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일어나서 학문 역사의 도덕적, 규범적 전제조건들이 그 파국에 의해 야기된 무질서의
형식들로부터 유래한다고 가정한다.
<반론>그러면 매킨타이어 스스로가 모든 가능한 논증적 지원으로부터 단계적으로 스스로
를 고립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대답> 하지만 이것은 가설 자체에 의해서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매킨타이어가 궁극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이다. 즉 서로 다
른 도덕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공유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같은 지평에서
사용하는 도덕적 언어와 개념들(즉, 도덕적 자원)이다. 이 도덕적 언어의 질서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데 매킨타이어는 이것을 반성하고자 한다. 만약 매킨타이어의 우려가
사실이라면 치유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매킨타이어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사상을 제시할 때 스스로 보다 근원적인 것을 탐구했다고 주장하
는데 매킨타이어도 이 점에서 그런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즉 대립하는 도덕철학자들조차도 공
유하는 도덕적 자원들에 대해 반성하고자 하는 메타 작업. 그리고 매칸타이어는 그 구체적인 방
법을 가상세계적 가정과 그것을 증명하는 사례 역할을 하는 다음의 도덕적 불일치의 예를 통해서
얻고자 한다.
처음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