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의 속삭임

(음악: It's you.- 영화 ‘슈렉’의 주제음악)

그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니?

그러니까… 그렇게 많이 만나지 못했던 사람, 그래서 별로 많은 얘기를 하지 못했던 사람, 그리고 오래 전에 멀리 떠난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에 대해서 갑자기 생각이 나고 또 꼭 한번 만나야겠다는 다급함에 혼자서 고민해야만 하는 이상한 느낌. 그 왠지 모르는 내 안으로부터의 속삭임에 이유 없이 안달하며 시간을 보내본 적이 있니?

무엇이든 그 시작과 끝을 가지니까, 그 속삭임에도 시작과 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먼 곳으로부터의 속삭임이 시작되는 시간은 아마도 1999년의 가을일 거야.

그러니까 그 가을에 태권도부 동문회가 있었지. 한 아가씨가 아버님을 따라서 모임에 왔어. 그 땐 태권도부에 여자 후배들도 거의 없을 때였고, 그래서 난 걱정이 좀 되었지. 왜냐하면 누구든 모임에 와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좋을텐데 사람들이 즐겁다는 것은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같이 있는가 하는 것에 크게 영향을 받거든.

그 날 늦은 오전에 모임이 시작되어서 나는 선배님들을 모시고 가까운 산등성이를 올랐다가 왔고, 그러고 나니 그 사람은 바쁘신 아버님을 따라서 모임을 떠나고 없더군.

그 때 멀리서 본 그 사람의 모습을 지금은 어렴풋이만 기억한다. 이대를 나왔다고 들었었어. 수학과라는 말…도 들었었던가? 아주 잠깐 의례적인 인사를 했었던 것 같기도 해. 그리고 그 시간의 모습은 별 의미없이 색바래지면서 내 기억 속에 남으려고 했단다.

시간은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바삐 흘렀고 그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세세하게 기억하기도 전에 그 다음 봄이 왔지. 그리고 또 태권도부 동문회 모임이 있었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 전 가을에 잠깐 보았던 그 사람이 또 아버님을 따라서 왔더라. 그 때의 모습은 조금 더 또렷하게 기억해. 어깨를 살짝 덮을 정도의 늘어뜨린 머리에 선 글라스를 끼고 있었어. 하얀 색에 가까운 브라우스 같은 걸 입고, 또 색깔은 기억할 수 없는 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 같애.

두번째 만났던 때의 느낌? 글쎄… 첫번째랑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어. 조금 먼 발치에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느낌. 그리고 그래야 할 것 같은 의례적인 다짐까지. 왜냐하면 손님처럼 부모님을 따라서 모임에 한번씩 참가하는 동문 따님들이 때때로 있었으니까. 조금 다른 것이라면 두번씩이나, 아마도 별 재미를 찾기 어려울 듯한 모임에 온다는 것이 조금 인상적이었을 뿐.

두번째 만났을 때의 기억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 볼까? 그 때 모습에서 첫번째 봤을 때와 달랐던 것 중의 하나가 선 글라스였거든. 그리고 선 글라스를 쓰는 것을 보고 굉장히 평범한 생각을 가진 여성일 거라고 생각했어. 5월이 지나가는 봄, 화창한 햇살은 선 글라스를 쓰기에 어울리는 날씨였고, 요즘은 대학생들이 선 글라스를 흔히 쓰지만, 그리고 나도 선 글라스를 쓰긴 하지만, 아직은 나에게 별로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평범한 여성, 평범한 여대생일 거라고 생각했다는 말은,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하게 작은 것들에 흔들리고 또 나쁘지 않은 사소한 자존심에 울고 웃는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동문회가 있으면 항상 그렇듯이 많은 어른들이 오시고, 후배들이 아직은 어른들과 어울릴 줄을 모르니까 나는 그걸 추스리느라고 바빴고, 그래서 나는 한 여자 후배에게 이렇게 말했지.

― 저 언니랑 가까이 앉아서 재미있게 얘기를 하고 그러렴.

그런데, 사람과 사람이 재미있게 얘기를 하고 친해질 수 있으려면 서로 얘기를 나눌 공감대가 있어야 하고, 그래서 처음 본 사람들 사이에서 흥미있는 얘기가 생겨나기는 쉽지 않아. 그러니까 그 후배도 단지 같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과 즐거운 대화를 이끌지 못했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잠시 짬을 내서 내가 그 사람 옆에 앉았어. 무슨 얘기를 할까?

“또 만나서 반가와요.” - 이렇게 내가 대화를 시작했던가? -.-;

“전공이 뭐예요?”

“수학과요.”

“수학? 나도 수학이라는 학문에는 관심이 많은 편인데. 별로 잘 하지는 못하지만.”

이 말은, 그 때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럼 몇 학년이죠?”

“전 졸업했어요. 95학번.”

“그래? 그럼 어린애잖아? 잘 됐다. 너 날 오빠라고 불러. 그럼 내가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해 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줄께. 어때?”

“그래요, 뭐.”

언제나처럼 장난끼를 얹어서 한 말을 그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 주었다.

그럼 이제 무슨 얘기를 하지? 그 다음에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깜빡 기억이 멎는다. 아마도, 아마도… 내가 그 사람과 처음으로 가까이 앉아서 얘기를 하면서 조금 놀랐던 것이 기억날 뿐.

“어-! 너 좀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구나?”

“내 성격이 어떤데요?”

“자신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 등이 또렷한데, 스스로의 자존심에 발목 잡히지 않는 성격. 참 쉽지 않은 형인데… 무슨 말이냐면, 이렇게 생각하면 쉬울 거야. 자신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은 자존심도 강하게 마련이지. 그런데 넌 현실을 냉정하게 살펴서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택할 줄 아는 성격이란 말이지.”

“오빠는 관상같은 걸 보시는 거예요?”

“관상같은 것은 아니고, 독심술이라는 거란다. 들어나 봤니, 독심술?” ^^

항상 버릇처럼 삐죽이 나오는 내 농담투.

“마음을 읽는 기술, 이런 거예요?”

“맞아.”

“그런 게 정말 있어요?”

“독심술에 관해서라면 내가 국내 제일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지.” -_-;;;

내가 짐짓 어줍잖게 무게잡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당연히 농담이라고 받아들일 테니까.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면 너무 재미없겠지? 네 마음도 한번 읽어 볼까? 하지만 그 전에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해 둘께…”

그러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꺼냈는데, 그 때 내가 속으로 생각했던 것은 두 가지였단다. 하나는 내가 저 사람이 흥미를 느끼는 얘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 이건, 나중에 얘기할께.

그런 얘기를 하면서 내가 그 사람의 눈을 들여다 보게 되었지.

어떤 사람의 눈을 들여다 보면 넌 무엇을 보게 되니? 난 어떤 것을 때때로 보냐면 그 사람의 생각의 한 가운데에 있는 어떤 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

“어! 넌 보기하곤 다르네. 뭐랄까, 사물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가졌네.”

그 기억이 지금도 그 얘기를 나누던 그 장소와 어울려서 화사하게 어울리고 있다. 조금 늦봄, 꽃은 화사하게 피었다고 지고 있었고 햇살은 점점 불타오르면서 다가 올 여름의 열정을 예고하고 있었지.

많은 세세한 것들을 더 기억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나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 시시콜콜한 얘기들도 어떤 의미가 있을까? 추억은 공유할 수 없는 것이라면 환상과 같지 않을까.

그 때, 잔디밭 위에 앉아서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난 다른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선배님들의 종용이 따라왔기 때문에 얘기를 멎어야 했었어. 대신에 내가 다시 연락해서 만나 다른 재미있는 얘기들을 해 주겠다고 했지.

그리고 한 동안 난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

왜냐하면 내가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는데 회신을 못 받았거든. 그 사람이 시원시원히 대화에 응해 주었으니까 편하게 생각해도 되겠지만, 원래 사람이란 눈 앞에서 볼 때랑, 또 며칠 안보다가 연락하려 할 때의 느낌이란 것은 사뭇 다르잖아. 그래서 조금 걱정도 되었고, 또 괜히 추근거리는 느낌을 줄까봐 조심스럽기도 했고, 가장 크게는 동문 선배님 가족이니까 신중해야 했단다.

그래서 전화를 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었던가 그랬어. 그래서 음성 메세지를 남겨 놓았지.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그리고는 약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단다. 그 동안 그 사람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생활 바깥으로 밀려 난 것 같았어.

그 두 달의 시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 해 봄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었는데, 여름이 다가 오는 그 계절에도 바람이 많이 불었던 것을 기억해. 여름 방학이 되고 학생들은 대학 교정에서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듯 싶다가도 계절 수업 때문에 잠깐씩 모이곤 했었고, 장마를 타고 셀 수 없이 많은 빗방울들이 1초 1초를 셈하며 하늘에서 땅까지 날았단다. 그 비와 바람을 타고 언덕 위의 나뭇가지들은 때로는 눈물 듣고 때로는 손흔들듯 내 기숙사 방의 창문 저 쪽 너무에서 넘실대곤 했었지. 그 두 달의 시간 동안.

그러다가 좀 밤늦은 시간에 전화가 왔어. 무슨 전화일까? 가끔 친한 친구들이 그렇게 늦은 시간에도 전화를 하곤 했으니까 놀랄 것은 없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전화를 했다는 것은 너무 놀라운 일이었지.

“음성 메세지 남긴 것을 들었어요.”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야 제 핸드폰으로 메세지가 들어왔어요.”

“난 2주 후에 미국으로 가요.”

- 그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

- 우리 같이 영화나 보러 갈까?

글래디에이터, 일본식 냉면, 분홍빛의 인형이 있는 까페 -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넌 어떤 것을 기억하지? 난 2000년 여름의 어느 날을 기억해. 그 날 어떤 사람을 만나서 같이 영화를 보고 더운 여름날 저녁을 같이 먹고 밤늦게까지 얘기를 했던 적이 있거든.

밤 하늘을 생각하면 달과 별이 저절로 생각 속에서 따라서 떠돌듯이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예전의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가 그렇게 밤 하늘의 별처럼 이리저리 밝아지는구나.

예를 들면, 동생 얘기.

“네 동생 목소리를 들었을 때 느낌은 굉장히 여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일 거라는 것이었어. 훨씬 감성적이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너랑은 꽤나 반대 성격이네? 우유부단한 성격이고.”

“우유부단한 것이 아니라 답답한 거지.”

“답답한 거든 우유부단한 거든, 어쨌든.”

쌍동이 동생이 있댔어. 성격이 좀 많이 다른.

“오빠는 왜 파란 옷만 입어요?”

“글쎄, 난 나랑 결혼하는 사람에게만 그걸 말해 줄 건데?”

“흥, 그걸 미끼로 여자를 꼬드기려는 거구나?”

“어떻게 알았지?”^^

또 다른 얘기들.

“나도 내년 가을 쯤에 미국엘 잠시 갈까 생각하는데.”

“미국에 오면, 그리고 시카고에 오면 연락하세요. 제가 식사는 한번 사죠.”

“정말?”

난 미국에 가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어쨌든 가지 않았는데 그 대신에 아주 가끔씩 그 사람 생각을 했다. 어떤 경우에 그 사람 생각을 했냐면, 여러 경우들이 있겠지만, ‘글래디에이터’란 영화에 대한 것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신촌의 먹거리 골목을 거닐다가 ‘이 근처에 일본식 냉면집이 있었는데’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때 그 사람을 신촌에서 만나서 많은 얘기를 하고 그 후에도 난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했어. 왜냐구? 우리 동문 가족이니까, 다른 사람과는 달리 아무리 잘 대해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일 테니까. 나중에 선배님께서 ‘고맙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겠어?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 단지 그런 사무적인 이유 말고도 말이야.

하지만 이 글의 제목이 왜 “미완성의 속삭임”이냐면, 중요한 몇 가지 말들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나중에 말하겠다고 약속한 이야기들까지도.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어.

난 그 사람을 마음 속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미국이란 데는 참 멀어. 지구 반대편에 있기도 하고, 비자를 받아야만 방문할 수 있는데 그 비자 받기도 힘들다고 하더군.

“미국에 가면 꼭 이메일을 해, 알았지? 내 사이트 주소를 기억하고 있다가 거기에 가면 이메일 메뉴가 있으니까.”

그건 실수였다. 내가 그 사람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 두어야 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사람이 메일을 보내지 않았지.

처음에는 미국에 금방 갔으니까, 공부하느라고 바쁘니까 그렇겠지 하는 생각을 했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는, 생활이 즐겁거나 바쁘니까 메일을 할 생각을 못하는 거겠지-하는 생각을 했어. 그리고 그 후에는, 하긴 그 사람이 내게 굳이 메일을 할 필요는 없겠군-하는 생각도 했는데…

2001년 1년이 지나고 2002년이 되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지.

그런데 5월이 되니까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 왜 그런지 몰라.

6월이 되니까 갑자기 그 사람 생각이 났어. 꿈에 보거나 한 것은 아니야. 그냥 아침에 눈을 떠서 집 뒤의 산을 보면, 혹은 오랫동안 손에 잡히지 않는 공부에 걱정이 커지면 왠지 너에게 꼭 한번 연락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그 사람에게 나쁘거나 힘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5월부터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상념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아닐까?

그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니?

길을 가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어떤 외딴 곳에 가 보고 싶다거나, 혹은 예전에 살던 집 근처엘 들러 보고 싶다는 무뚝뚝한 집착 같은 것. 아주 어린 시절의 친구가 갑자기 보고 싶다거나 혹은 어제 만난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 보고 싶다거나 하는, 자신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어떤 이끌림.

그런 이상하고 뜻밖의 느낌에 항상 이끌릴 필요는 없지. 변덕스러운 기분보다는 계획된 노력이 더 가치있는 경우가 많지.

그래서 여기에서 말할 수 없는 얘기들이 많이 있어. 마음 속에서 웅얼거리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잊혀질지도 모르는 얘기, 하지만 현재 속에서는 강하게 나의 마음을 흔들고 잡아당기는 이야기들, 그 사람이 내게 말했던 것들, 내가 그 사람에게 말하지 못했던 어떤 것들까지.

하지만, 재미있는 영화에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때론 불필요해 보이는 주변 인물들과 소품들도 필요하듯이, 그렇게만이라도 우리 삶에서도 그런 것들에 조금씩은 의미를 두어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냥… 이렇게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