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점 포기에 대하여


 

 

주로 "바쁘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뭔가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자기 자랑"으로 들리는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새는.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제가 별 볼일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좀 바빠서(결국에는 자기 자랑을 하고 말았음-.-;) 대학생활에 대한 충고를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방명록을 통해서 "연진"님의 독촉을 받고 말았군요. 관심을 보여주신 연진님께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나는 대학생 새내기들에게 학점을 포기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정말 공부를 하지 말고 나쁜 학점을 받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학점에 매달리지 말고 대학생활을 즐기면서 오히려 두마리 토끼를 잡도록 노력해 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괜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에 저의 사례를 통해서 설명해 보도록 하죠. 물론 저도 썩 대학생활을 잘 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저 자신 별로 후회없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전 고등학교 다닐 때 하고 싶은 놀이, 보고 싶은 영화 등을 모두 참으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별로 실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노력"이 남은 부분을 보충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동시에 이렇게 위안을 삼았습니다. "대학생이 되면 이렇게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지는 않겠지."

그리고는 마침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첫학기를 시작했고 중간고사를 치렀습니다. 대략 5월 초쯤 중간고사를 치르는데, 3,4월에 열심히 놀다가 갑자기 벼락치기로 공부를 해야만 했죠. 그렇게 그런대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기말 고사가 다가왔습니다.

대학에서는, 특히 저와 같은 인문계열 학생은 수강신청을 할 때 자신이 듣고 싶은 강의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기말 시험이 다가오면 공부하기가 그렇게 싫은 것이었습니다. 대신에 다른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정치학, 경제학, 철학, 심리학 등. 그 순간 짜증이 나더군요. 내가 대학생이 되면 고등학생 때처럼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지는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여전히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 물론 정도차는 있었지만요.

그리고는 결국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다. "현재(대학 1학년)로서는 내가 급한 불은 다 껐다. 고교생때까지 모범생 소리를 들으면서 공부의 노예가 되어 지냈는데, 이제는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포기이다."- 뭐, 이런 식의 생각을 한 거죠.

그 때 생각한 것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상황이 바뀌어도 내가 바뀌지 않는 이상 달라질 것은 없다. 내 안의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가? 주어진 것에만 매달리고 남들이 다 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제 달라지려면 지금까지 내가 습관적으로 매달리던 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것들은 당시당시에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돌아보면 사소한 것일 수 있다. 마치 초등학생 때 반에서 1,2등을 다투는 것이 그 때는 중요했지만 고등학생만 되어도 사소한 것이듯이, 지금 대학 과정의 학점이 중요해 보이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는 공부하던 책을 갑자기 덮고 기말 고사를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포기"라고 말했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었죠. A를 받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C 정도로 만족하는 것 뿐이니까. 저는 강의는 열심히 들었거든요. 그게 재미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고 교수님과 대화하는 것 등이.

그리고는 도서관에 가서 당시에 듣고 있던 과목들과 전혀 상관없는 책들을 골라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읽었던 책이 아마 "윤리학"이었을 것입니다. 뭔가 관심이 가는 책을 골라서 읽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가 1학년 2학기에는 사회과학에 빠져들기 시작했죠. 사회과학이 재미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사회과학을 공부하다 보니까 너무 실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회과학은 과학이 아닌 것 같다. 특히 정치학-!!!

그래서 내가 정치학 이론을 만들어 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목표는 이런 것이었죠. 동서고금의 모든 정치현상을 일관된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 보자. 뭔가 이념적 주장(철학적 주장)과 파편적인 사회현상에 대한 설명을 마구 섞어 놓은 짬뽕 이론 말고.(이런 말씀은 정치학을 전공하는 분들께 실례가 될 수 있겠지만, 하여튼 그 때의 무지막지한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 뿐이니 이해해 주세요.)

그렇게 정치학 공부를 시작했다가 2학년 말쯤에는 다시 철학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욕심이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드는 정치학 이론은 좀더 동양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특히 한국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것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약 2학년 2학기 때까지 철학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에 학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냐 하면 그것도 그런 건 아니예요. 학점은 이렇게 관리했습니다. 우선 조사를 통해서 학점을 잘 주는 강의들을 골라냈어요. 그리고는 그 강의들을 우선적으로 신청했죠. 그러면 대체로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평균적인 학점은 받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는 꼭 듣고 싶은데 학점을 잘 얻기 어려운 강의는 청강을 했습니다. 그러면 역시 시험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지죠.

대신에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정치학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서 책으로 출판했죠. 그게 이 사이트의 "정치학" 란에서 볼 수 있는 "생존의 소묘"라는 글입니다.

좀 무모한 시도였지만, 기분은 좋았어요. 하지만 여러분들께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 이야기입니다.

저는 학점에 얽매이지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보다 더 좋은 학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건 학점을 잘 주는 강의들을 들은 탓도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통해서 강의내용에 접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이 "이건 너희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필요하다"라고 내가 생각한 것을 교수님이 설명해 주는 것으로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소 전문적인 수준으로 공부를 해 들어가면 대학에서의 모든 분야는 대체로 다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학에서 철학으로 건너가고 거기서 다시 인류학으로, 물리학으로, 수학으로 등등... 계속 건너다니면서 그 연관성을 저절로 알게 되고 더 나아가서 그게 내 문제가 되어버린 거죠.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이론의 작은 차이도 내게는 크게 다가오면서(왜냐하면 내가 이미 그 이론의 한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집요하게 매달리게 되었어요. 학점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론 자체에 매달리는 거죠.

그러다보니 이젠 시험 때 웬만한 문제가 나오더라도 할 말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웬만한 것들을 다 끌어다 붙여서 논의할 수 있게 되었죠. 여전히 학점에 얽매이지는 않았지만 학점을 받는 것이 어렵지 않았어요. 달라진 것은 이거죠. 다른 학생들은 시험 때만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난 매일 도서관에 가서 책 읽었습니다. 그것도 재미로 말이죠. (이건... 정말 자랑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조금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전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 할 일을 어떤 이유에서든 열심히 했다는 것은 자랑거리일 수 있겠죠.)

다소 난삽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사소하지만 지금 당장 여러분을 옭아매고 있는 욕심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학점이죠. 저의 목표는 "졸업할 수 있을 정도로만 학점을 받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신 그 시간과 정열을 쏟을 다른 좋은 경험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면 지나고 나서 많이 후회할 거예요. (한번쯤, 4학년 선배들이나 대학원 선배들에게 그들의 대학생활 느낌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지만 쉽지는 않겠죠. 높은 곳에서 물 속으로 뛰어들려는 사람처럼, 물이 깊어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순간적인 공포감은 사지를 꼭꼭 묶듯이 방해할 것입니다. 작지만 결단과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단, 학점 따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공부하기 싫다고 공부를 포기하지는 마세요. 그럴 바에는, 역시 학점에 매달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조건은 분명히 변했을 것입니다. 고등학생의 조건과 대학생의 조건은 분명히 차이가 큽니다. 그러나 그런 4년의 시간을 보내고도 고등학교 시절을 4년 더 한 것과 같은 기분으로 졸업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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