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만일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하지만 만일
당신이 벌레라면
아주 늦게 일어나야 하겠지. <쉘 실버스타인의 “일찍 일어나는 새”에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을까 늦게 일어나는 것이 좋을까? 이 시를 보자면 그것은 새의 입장에서 생각하는가 벌레의 입장에서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많은 경험을 할수록 우리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문제처럼 입장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든 혹은 사랑이든, 뭐든지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라고.

… 그런데 과연 그럴까?

상대주의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방금 생각했듯이, 모든 것이 입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입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곧 상대주의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아주 깊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주의와 더불어 철학사의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서 고대 희랍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철학사를 공부해 보려 한 사람들은 고대 희랍에서 서양 철학사가 시작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 역사는 탈레스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을 논하다가 원자론에까지 발전했다는 것이 아마도 책의 맨 앞에 나올 것이다. 하지만 현대 철학 사상에까지 분명하게 이어지는 철학의 큰 틀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우리는 최대한 간단하게 서양 철학사를 여행할 것이므로 이러한 사상사적 영웅들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다.

영웅이 있다면 거기에는 영웅의 적이 되는 무리들이 있는 법이다. 소크라테스라는 영웅의 적은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의 대립을 사람과 사람의 대립이 아닌 사상적인 대립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객관주의와 상대주의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철학적으로는 보다 의미가 있다. 혼란한 세상이 먼저 있고 영웅이 나타나듯이 상대주의가 먼저 있고 소크라테스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를 먼저 이해해 보자.

다시 말하면, 상대주의란 간단히 말해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상대주의는 사상사의 여러 측면에서, 즉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흔히 나타난다. 그래서 서양에도 있고 동양에도 있으며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아마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왜 상대주의는 흔할까? 상대주의의 입장이 매우 그럴 듯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둘러보면 그런 이유들을 여러 가지 발견할 수 있다.


한 예를 들어 보자. 내가 프랑스에 처음 여행갔을 때 거기 교민으로 계시는 태권도 사범님으로부터 프랑스의 예절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거기서는 재채기가 나올 때 그것을 “에취!”하고 크게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콧등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재채기에 대한 강한 열망을 억제해서는 최대한 소리를 죽여 “에-쉬-”하는 정도로 가라앉혀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재채기의 그 시원함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프랑스 사람들은 원초적인 반응에 모두 엄격한가? 그들은 식사 중에 코를 “킁-!”하고 소리를 내어서 푸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재채기는 자연스럽게 허용하지만 코 푸는 행위는 더럽고 예의에 어긋난다고 금지하는 행동인데 말이다.

문화간의 이질성에 의해서 나타나는 가치관과 생각의 차이는 우리를 상대주의적인 입장으로 쉽게 이끈다. 어떤 것이 바른 예절인가 하는 것은 나라마다 다르다. 딱히 정해진 것이라고는 있기 어렵다. 예절만 그런가? 사물이 보이는 모습도 입장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궁극적으로 올바르게 사는가 하는 굉장히 중요해 보이는 문제조차도 입장에 따라서, 그리고 문화에 따라서 달라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입장에 따라서 달라 보일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이것이 상대주의이다.

그런데 이렇게 설득력있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전문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상대주의”가 별로 좋은 이름이 아니다.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당신은 결국 상대주의 아니냐?”라고 지적하는 것은 상당히 치명적인 비판으로서 작용한다. 왜 그런가? 상대주의는 그 입장 속에 근본적으로 모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는 것이 상대주의의 입장이었다. 여기서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는 것 자체도 그 ‘모든 것’에 포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모든 것이 되니까. 그리고 여기에도 그 상대성이 적용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이 상대적이 된다. 즉 모든 것이 상대적인지 아닌지가 입장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곧 어떤 경우에는 상대적이지 않은 어떤 것도 있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주의 스스로 틀릴 때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상대주의가 가진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문제점이다.

간단한 서양 철학사 <1>: 상대주의와 객관주의

하지만 철학 초보자들에게는 방금 설명한 상대주의의 문제점이 일종의 ‘말장난’, 혹은 ‘궤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왜 이 문제점이 중요한지 좀더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그러기 위해 내 얘기를 잠깐 해 볼까?

 

나는 합리적인 것을 좋아하고 합리적인 것만을 신뢰한다. 뭐랄까… 신비적인 것, 그래서 독단에 휩쓸릴 수도 있고, 혹은 사기꾼의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태에서 단지 ‘믿음’만을 강요하는 그런 것은 솔직히 경멸한다. 나는 인간의 이성의 힘을 신뢰하는 편이다. 그건 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진, 일종의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것이란 믿음도 일종의 독단이다. 예를 들어서 인간에게 있는 예감이나 육감 같은 것도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나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분명히 안다. 아주 오래 동안 만나지 못했던 여자가, 그것도 내가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있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이유 없이 지독히 만나고 싶어졌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서 느껴졌었다. 나중에 나의 그 이유 없던 예감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나도 신비스럽게 느껴졌었다.

 

나의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그냥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얘기를 가만히 따져 보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합리적인 것만을 인정하는가, 아니면 비합리적인 것도 조금은 인정하는가? 처음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만을 신뢰한다고 하구선, 뒤에서는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서 어떤 여자에 대한 나의 예감을 얘기한 것이다.

어떤 주장이든 그 말의 앞뒤가 맞아야 한다. 방금 본 것처럼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다르다면 내 말을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내 말 전체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에서의 문제점도 이런 것이다. 말의 앞뒤가 안맞는 것 말이다. 상대주의에서 문제가 생기는 부분이 바로 상대주의의 주장에서 핵심 내용이고 그래서 그것이 치유될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상대주의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간단히 말하면,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일단 어떤 주장이나 입장이 있다면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 때 ‘말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말의 앞뒤가 맞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대주의의 문제점을 간단히 말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상대주의의 반대 입장에 있는 생각을 “객관주의”라고 한다. 객관주의는 모든 것이 개관적이고 그래서 상대적이지 않다는 입장이 아니다. 객관주의는 최소한 하나의 객관적인 진리(혹은 절대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의 반대는 ‘최소한 하나’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