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철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들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똑같이 설명했기 때문이다. 헤겔은 모든 것을 긍정했다. 독재도 정의롭지 못한 것도 모두 발전과정의 부분으로서 긍정했다. 이것은 사실 상대주의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전쟁이 있었다. 1, 2차 세계 대전 말이다. 헤겔 철학은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 피와 상처, 그리고 크나큰 고통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다. 반대로 모든 것이 합리화될 수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한 미치광이 같은 철학자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신은 죽었다”라고 외쳤다. 그 사람이 니체이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이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쓴 책은 모두 자신이 직접 돈을 들여서 출판해야 했으며 그나마도 팔리지 않아서 헌책방에만 꽂히게 되었다. 100년 후에야 세계는 니체의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니체가 말한 내용의 핵심은 존재하는 것들이 ‘의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힘을 원한다. 힘을 원하는 의지가 힘을 얻으면 그 의지는 커진다. 더 커진 의지는 더 많은 힘을 원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반복이 이루어지면서 의지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끊임없이 돌아온다. 여기서 힘을 원하는 의지의 본성을 가리켜 ‘힘에의 의지’ 혹은 ‘권력에의 의지’라고 부르고 새로운 출발점으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것을 ‘영원회귀’라고 부른다. 이것이 니체 철학의 중심 용어 두 개이다.

이것이 금방 쉽게 이해되지는 않겠지만 모든 철학의 핵심 생각이 그렇듯 당연한 측면이 있다. 즉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갖기 원할 텐데, 그것들은 또 다른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기 위한 어떤 것이다. 이 ‘원함’이 의지이고, ‘할 수 있음’이 힘이다. 돈도 그러하고 지식도 그러하다. 즉 힘에의 의지인 것이다.


그러한 힘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즉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영원히 반복된다. 영원회귀인 것이다. 진리와 확실성, 도덕, 예술 등은 바로 이러한 힘의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의지가 어떤 힘을,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주어질 때 거기에서의 가장 바람직한 삶이란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항상 새로운 상황에 맞게 자신을 재창조해나가는 삶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모습이다.

한편 니체의 뒤를 이어, 헤겔 철학에 대한 반항으로 실존주의가 나타났다. 실존주의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것을 모토로 하는데, 그 기본적인 생각을 쉽게 말하면 이렇다. 즉 ‘무엇이 그것 자체인가’, ‘무엇이 참된 진리인가’와 같은 추상적인 물음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인간적 상황 속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우선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실존’이란 ‘인간’을 의미한다. 실존주의는 헤겔의 전체론에 대한 반론으로 이해하면 제일 쉽게 납득이 될 것이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전체를 위한 부분이지만 실존주의에서는 개별적인 상황 속의 문제, 즉 부분이 중요한 것이다.

간단한 서양 철학사 <9>: 상대주의자들(니체와 실존주의)

이러한 니체와 실존주의의 공통된 특징 하나는 그들의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상대주의가 나온다는 것이다. 힘에 따라서 기준이 달라진다-이것이 니체의 입장이다. 기준이 달라지므로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한편 실존주의는 각각의 개인이 처한 상황을 가장 우선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문제가 가장 중대한 문제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지만 이제는 가난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가난이 가장 중대한 문제이다. 모든 것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상대주의 계열의 마지막 역사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객관성을 확립하기 위한 합리주의(이것이 “모더니즘”이다.)의 노력이 기득권을 만들고 또 기득권을 악용해서 힘이 약한 반대 논리를 억압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흐름 안에서 이성이 감성을 억압하고, 백인이 흑인을 억압하며,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그 객관성이라는 것을 자세히 분석해서는 궁극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가리켜서 ‘해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어려운 말들이 있지만, 이런 것들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기억해야 할 포스트모더니즘의 뼈대는 이것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려는 것 자체도 분위기나 목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예를 들어서 힘이 있는 자에게는 힘이 강한 것이 올바르게 보이고 힘이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 올바르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즉 상대주의이다.

문제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입장이 상대주의일 수 있다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학문으로서의 철학에서는 다른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상만큼 이들을 많이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런 철학들이 유행처럼 인기를 얻기는 해도 말이다.